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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3)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들(野)의 시인, 이병훈

  • 등록 2020.09.24 16:14:55
시인 이병훈은 1925년 4월 15일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에서 태어났다. 옥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옥구 상촌에 있는 염의서원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6.25의 참상을 겪으며 근현대사를 맨몸으로 지켜왔다. 1950년부터 군산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6.25 전쟁 때는 종군기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삼남일보 사회부장을 거쳐 금강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문학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우하면서 문학에 정진하였다.

시인은 군산문학회 뿐만 아니라, 대전 호서문학회와 솜리문학회 동인으로도 활동하면서 시화전 및 앤솔로지 발간 등을 꾸준히 하였으며, 1959년 4월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1970년 첫 시집 『단층』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하포길』(1981), 『어느 흉년에』(1982), 『멀미』(1983), 장편서사시 『녹두장군』(1991), 『포격당한 새』(1994), 『참으로 좋은 날은 땅에 살다가』(1997), 『물이 새는 지구』(2001) 등 시집 17권, 연작시 「소리」(조선문학, 60편), 「나무새」(문학세계,60편), 「휴전선의 억새」(자유문학,60편) 등을 발표하였고, 수필집 『글썽거리는 서경』(1999)을 내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오랫동안 시인과 함께 문학의 길을 걸어온 군산의 이복웅 시인은 “시인의 초기 시는 고은, 정양, 정렬, 이복웅 등과 함께 민족문학작가회의 태동을 주도할 만큼 현실 참여적이고 저항적”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병훈 시인을 포함한 이들은 관계기관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한때 군산을 방문한 고은 시인과 기념사진을 찍은 일이 있는데, 그 사진에는 “불멸의 우정”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을 만큼 그들은 나이를 떠나 막역한 문우로 늘 함께했다. 그러나 이후 이병훈의 시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농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드러냄으로써 “들[野]의 문학”을 새롭게 정립하였다.“고 했다.

원형갑은 시인을 생각하면 군산의 토요동인회를 떠올리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송기원을 좌장으로 하여 정연길, 김동빈, 고은, 신석정 등이 참여하였으며 여류시인 정윤봉 시인의 집에서 첫 모임을 했는데, 이병훈 시인은 남달리 엉성하게 비썩 말라 눈만 뻥그레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시인으로서 밖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그를 기억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늘 조용하고 말이 없었으며 때로는 어색한 듯, 때로는 놀란 듯, 때로는 민망하고 시름겨운 듯 가붓이 웃음을 머금고 가끔은 뒷전에 앉아 소리도 없이 훌쩍 떠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그 후 토요동인회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송기원은 서울로 돌아갔고, 고은도 떠났다. 정윤봉도 군산을 떠났지만, 이병훈은 신문사 일을 하면서 군산에 자리잡고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고향을 지켰다. 이런 시인을 두고 원형갑은 “고향과 시인은 뿌리와 잎새라고 할 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사이”라고 했다. 시인은 고향을 사유하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고향의 말씨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고자 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평생 고향 군산을 사유하였으며 군산의 말씨를 지키는 말지기였다. 다음 시는 그런 시인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다.



쉰 넘은 나약한 시인

난 해와 내기하면서 해로하는 농사꾼의 이름으로

겨우겨우 얻은 얼마간의 낱말 소출을 저낸다.

낱단으로 묶여 들어온

아지랑이의 곡식이여

눈썹 아래 지적거리는 이슬의 열매며

꺼끄레기가 까실거리는 햇빛의 소출을

모두 훑어서 저낸다.

멍석 위에 쌓이는 낱말들이다.

목을 길게 뽑고 오직 작게 다진 것

최종 최초의 맺음으로 남은 것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만을 자청하는 낱말들이다.

난 머리가 흰 낱말을 저낸다.

앞뒤 마당 큰방 아랫방 빈채로 열어놓고

하늘과 내기하는 농사꾼의 이름으로

-이병훈의 시 「멀미 16」 전문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멀미』(한국문학사,1983)에서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하여 “시 행위 그것은 특수하지 않고 시인도 특수하지 않다. 평범한 일상의 행위에 속한다. 평범한 일상을 인간답게 노래하려는 행위이고 그 행위자에 불과하다.”라고 밝히면서 시인에게는 시 쓰는 일 자체가 생존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948년 당시 군산문학회 동인으로 박희선씨 등과 더불어 모임을 하고 작품 비평회를 등을 갖는 등 군산지역 문학동인의 근간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언론사 논설위원, 문인협회 군산지부장, 예총 군산지부장, 군산 문화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1973년 제14회 전라북도 문화상(문학부문)수상 이후 군산시민의 장 문화상(1976), 제1회 모악 문학상(1993), 제1회 신석정 촛불문학상(2007)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향아 시인은 「이병훈의 시 세계」라는 글에서 “시인이 죽음이나 사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하다. 두렵다고 거부하지도 슬프다고 회피하지 않는다. 살아서 이루지 못했던 소망을 사후의 세계에서 성취하려고 다짐하지도 않으며 부활이나 환생의 꿈도 꾸지 않는다. 시인이 인정하는 혼백의 세계는 백지와 같은 공간이다. 그의 혼백이 부유하는 공간에는 극락도 천당도 없고 연옥도 지옥도 없으며, 혼백은 무엇을 저항하거나 도모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이나 ‘혼백’을 내걸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구속에서 자유롭다”라고 하였다.



단 한 줄 시라도 전할까 하여

먼저 간 병권 형에게

띄운 편지가 되돌아왔다.

날짜와 시간이 지워져 있었다.

사연마다 고스란히 지워져

백지로 돌아왔다.

저승은 그저

비어있는 곳인가 보다.

-이병훈 시「소인(消印)」 전문
 

 

시인의 시는 인생의 순리를 다루듯 자연스러운 언어 구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면서도 아프게 노래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우직하게 고향을 지키며 문학의 향기를 피워낼 줄 알았던 시인 이병훈, 그의 육신은 이 땅을 떠났지만, 그가 우리 문단을 지키며 보여준 행보는 우리 문학사에 하나의 지표로 남게 되었다.

시인의 고향 후배인 고은 시인은 이병훈 시인을 “늘 얼굴이 붉은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었지만, 평소에도 얼굴이 불그스레했던 그를 보고 한 말이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제7권)에서 이병훈 시인을 “삭막한데 지키고 살며 모진 소리 하나 내본 적 없는 시인”이라고 하였다.



다 떠나버렸는데

군산항

그 삭막한 데 지키고 사는 시인 이병훈

환갑 진갑 훨씬 넘어서도

조촐히 청춘이어서

어디로 떠날 줄 모르는 시인 이병훈

군산항 가엔

반드시 그가 있다.



모진 소리 하나 내본 입 아니어서

그 입은 싱겁다

그 눈도 싱겁다

그 코도 느릿느릿 낼까 싱겁다.



그러나 그 마음속 깊이

옥산 들 눈보라 들어차 있어

춥구나 옷깃 여미어라

-고은 시 「이병훈 」 전문



이병훈 시인은 신석정 시인이 특별히 아꼈던 제자이다. 시인은 언제나 석정 시인 가까이에서 그를 닮고자 했다.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초기의 석정 제자들과 함께 석정 문학을 전파하고 기리는 데 앞장섰으며, 석정문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스승인 ‘신석정’을 제재로 하여 여기저기에 발표한 70여 편을 시를 모아 신석정추도연작시집 『변산 골짝에 이는 바람』(부안문화원, 2000)을 내기도 했다. 이 시집은 신석정의 시 정신의 해명에서부터 1974년 작고할 때까지의 생애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는 산문이 아닌 시라는 양식을 통해서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시인이 석정을 만나 시인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기꺼워하는 모습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집에는 신석정의 어조, 냄새, 모습, 행동은 물론 스승이 안고 살았던 감성, 정서, 따뜻한 애정, 손길, 그 모든 것들이 어느만치는 시인의 여러 곳에 스며 시인을 오늘의 실상으로 살아 있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2009년 2월 15일 숙환으로 작고하였으며, 시인의 영결식은 전북 문단 역사상 최초로 전북문인장으로 많은 문인의 애도 속에서 치러졌으며, 이때 장례위원장은 이동희 시인이, 집행위원장은 군산의 이복웅 시인아 맡았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