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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사라지는 강원문화]다산 정약용이 예찬한 '門岩'(문암) 의암댐에 가로막혀 수면 아래 가라앉다

⑦ 소금강과 다산 그리고 의암호

 

유배 풀려나 두차례 춘천 찾아
석금강이라 불린 '삼악산' 유람

유유자적 배 띄우던 '신연강'
댐에 막혀 인공호 '의암호'로
금강산이라 찬사한 '문암'은
찻길에 잘리며 옛 모습 잃어


오래전부터 많은 시인, 묵객은 춘주(春州·현 춘천)를 방문해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했다. 그중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은 두차례나 북한강 물길을 타고 올라 춘천을 찾았다. 공교롭게 정약용 집안과의 혼맥(婚脈)이 춘천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조카, 다른 한번은 손자의 며느리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춘천과는 꽤나 깊은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춘천이 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詩) 수십 수를 남겼다. 200년 전 그의 발자취를 쫓아가 본다. 그가 춘천의 초입에서 본 '금강(金剛)'의 자태는 지금은 온데간데없다. 그저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구분하는 콘크리트 결계(結界)만이 산 옆구리를 타고 죽 늘어서 있을 뿐이다.

다산 돌로 이뤄진 '금강'을 조우하다

석금강(石金剛)은 춘천의 '삼악산(三岳山)'을 이르는 별칭이다. 춘천을 소개한 인문지리지 '수춘지(壽春誌·1953년)'는 삼악산에 대해 '모두 돌산으로서 웅장하면서 아주 험준하다는 점에서 더불어 견줄 산이 없을 정도다. 바위 꼭대기나 돌 모서리가 기괴함은 형용하기조차 어려운데, 이를 일러 석금강이라 한다'고 했다.

보통 '금강'은 지역의 대표적인 절경을 우리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에 빗대 부를 때 붙이곤 했는데 춘천에는 무려 3개의 금강이 있었다고 한다. 석금강에 이어 수금강(水金剛·화천 사창리 곡운구곡)과 토금강(土金剛·춘천 서면 성재봉)이 그것. 춘천의 삼금강 중에서 삼악산은 뱃길을 타고 춘천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는 관문과도 같은 곳이었다.

1818년 18년 동안 이어진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로 돌아온 2년 후인 1820년과 다시 3년 후인 1823년 춘천을 찾았다. 평소 북한강 유람을 원했던 다산은 경기도 남양주 양수리 건너편인 능내리 나루를 출발해 대성리와 청평을 지나고 홍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관천리, 남이섬과 가평, 강촌을 거쳐 현재 의암댐 인근에 도착했다. 지금이야 의암댐에 가로막혀 물길을 이용해서는 더 이상 춘천 방향으로 올라갈 방법이 없지만 당시에는 유유자적 주변의 풍광을 즐기며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북한강을 거슬러 춘천으로 들어오던 다산은 배 위에서 그의 왼 어깨 위에 있는 삼악산, 석금강과 조우했다. 그런데 어떤 일인지 다산은 그가 남긴 시 '삼악산에서 두보의 오반시에 화답하다(三嶽和五盤)'에서 삼악산을 두고 '아름다운 봉우리는 없다(雖無娟妙峯)'는 표현을 한다. 석금강이라 불리는 절경을 보고도 그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용화봉, 청운봉, 등선봉이 섭섭해할 만한 품평이 아닐 수 없다. 물길로 오는 통에 삼악산의 속내를 못 본 탓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 일제강점기 삼악산 강쪽 둘레를 타고 서울과 춘천을 잇는 도로가 생겨나면서 등선폭포 등 숨겨진 절경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고 이를 통해 삼악산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문암(門巖)' 그리고 '신연강(新延江)'

다산은 산과 강이 어우러진 이 지역의 전체적인 풍광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옛 선인들도 왼편으로 삼악산, 맞은편 드름산이 빚어 낸 협곡을 두고 작은 금강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렀을 정도니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춘천의 입구에서 맞닥뜨린 풍광이 '금강산'의 그것과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다산은 춘천 인근에 다달아 '신연강(新延江)'을 타고 주변의 경치를 즐겼다. 그런데 강 이름이 춘천 토박이에게도 낯설다. 그럼 다산이 유랑을 즐기며 유유자적 배를 띄우던 신연강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강은 댐(의암댐)에 가로막혀 인공호 '의암호'로 변신한다. 1967년에 의암댐이 완공됐다고 하니 그때부터 물길은 막혔고, 댐 높이만큼의 삼악산은 물속에 잠겨 버린 것이다. 물에 빼앗겨 버린 풍경은 맞은편 드름산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 신연강 위에 떠 있던 다산의 시선 오른편, 춘천시내에서 의암댐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문암(門岩)'은 금강산과 비교되던 곳이다. '수춘지'에서 김영하는 이 문암을 두고 '문암의 형승이 금강산과 흡사하다(門巖形勝似金剛)'라고 노래했다. 삼악산과 드름산이 만들어 낸 협곡의 장엄함을 감상하던 다산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마치 춘천으로 들어가는 대문 같은 문암을 발견하고는 감탄한다. 시 '석문(石門)'에서 그는 문암을 두고 “하늘이 만든 특별한 곳(天作有殊狀)”이라는 표현으로 예찬했다. 하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칭찬해 마지않던 문암은 물에 잠겨 가려지고 찻길에 잘리면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진 듯하다. 개발에 치이고 편리함에 밀린 애잔한 모습이다.

문암을 보고 신연나루를 지나던 다산은 또 다른 시를 남긴다. '신연도에서 두보의 길백도시에 화답하다(新淵渡和桔柏渡)'를 보자. “사랑스러워라 이 무릉도원의 물은(愛此仙源水)/ 본디 금강산에서 나온 것인데(本出長安橋)/ 평소 명산을 구경하고픈 소원을(夙昔名山願)/ 늘그막에도 끝내 이루지 못했다가(到竟蕭蕭)/ 이번 길에야 다 구경하게 되니(今行可窮覽) … (하략)” 다산이 그토록 노래한 아름다움의 편린들은 의암댐이 만들어낸 의암호의 수변 아래 오롯이 간직돼 있을까.

오석기·김남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