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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新 팔도명물] 여름밤의 서늘한 초승달 빛을 닮은 전주 이강주

 

 

옛부터 전라북도 전주시는 술로도 유명하다. 조선의 3대 명주로 불리는 이강주는 전국을 넘어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이강주는 감기 등 건강에 좋다는 의미로 약주로도 불렸다. 그래서 인지 약고자를 붙여 ‘이강고(梨薑膏)’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강주는 배이(梨), 생강강(薑), 술주(酒)자를 써서 배와 생강의 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감기에 좋은 배와 생강을 녹여낸 소주라는 것이다.

이강주는 일제 강점기 가양주를 금지하는 제도하에 밀주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1987년 복원되면서 전통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노력에는 전북 무형문화재 조정형 명인이 큰 역할을 했다.
 
△이강주 어떻게 만들어지나

이강주는 미황색이 도는 25도의 약소주로 배의 시원한 청량감과 더운 생강, 숙취를 보완하는 울금과 더불어 독특한 향취를 가지고 있는 계피가 어우러진 맛과 멋의 술이다. 벌꿀이 가미돼 목넘김이 부드러우며, 증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오래 둘수록 둥근 맛을 자랑한다. 마신 후에도 전혀 머리가 아프지 않다.

이 때문에 옛 선조들은 이강주의 술 색깔이 맑으면서 은은하고 부드러워 여름밤의 서늘한 초승달 빛으로 묘사하면서 술잔 속의 여유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강주의 뛰어난 맛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우선 햇밀을 거칠다 싶게 빻아 물로 고루 버무려 포로 덮은 후 곡자틀에 넣어 힘있게 밟아 단단하게 형을 뜬다.

형을 뜬 곡자는 보습이 잘 되는 곳에 놓아 실온 25도 정도에서 곡자의 최고 품온이 45도가 넘지 않게 손질한다. 약 10일 정도 지나면 차차 품온이 내려가게 되는데 이때는 약 30도 실온에서 7일 정도 보관하고 건조한 곳에서 14일 정도 보관한다. 이 과정이 끝난 후 약 2개월 정도 저장하면 이강주에 쓸 수 있는 좋은 누룩이 만들어진다. 이어 백미로 고슬고슬하게 밥을 지은 후 식힌다. 밥이 완전히 식으면 이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술을 담근다.

1주일 된 이 술을 소주고리에 넣고 전통 방식으로 소주를 내린다. 담근술을 다시 솥에 넣고 불을 지피면서 냉각수를 교환해 준다. 찬 기운과 만난 알코올증기가 액화돼, 소주고리에서 높은 도수의 소주가 떨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코올 도수가 낮아진다.

약 35도로 내린 전통소주에 이강주의 주원료인 배, 생강, 울금, 계피를 넣고 3개월 이상 침출시킨다. 마지막으로 꿀을 가미한 후 숙성시킨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강주는 주도가 높아 오래 갈수록 맛과 향이 좋아진다.



△역사 속에도 등장하는 이강주

이강주는 다양한 문헌 속에서 그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대표적이다. <임원경제지>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풍석 서유구(1764~1845)가 만년에 저술한 농업백과사전이다. 농사부터 음식, 의류, 건축, 건강, 의료, 의례, 예술, 지리, 상업 등 조선 및 동아시아의 의식주 문화가 집약되어있는 유서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통해 이강주 “아리(거위의 깃털처럼 희고 향과 맛이 진하며, 껍질이 얇고 즙이 풍부한 배)의 껍질을 벗기고 돌 위에서 갈아 즙을 고운 베주머니에 걸러 찌꺼지는 버리고 생강도 즙을 내어 밭친다. 배즙, 좋은 꿀 적당량, 생강즙 약간을 잘섞어 소주병에 넣은 후 중탕하는 방법은 죽력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순조 때의 문신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은 <계산기정>에 조선 최고의 술 중 하나로 이강주를 추천했고,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도 우리나라 5대 명주 중 하나로 이강주를 꼽았다. 이 문헌들에 의하면 이강주는 조선시대 상류사회에서 즐기던 고급 약주로서 “신선과 어울린다”는 평판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많은 문헌에서 이강주를 언급하며 그 역사와 전통을 증명하고 있는데, 봉산탈춤의 말뚝이 사설 부분에는 아예 “자라병, 강국주 이강주를 내놓고”라는 대사가 나오고, 한미통상조약 체결 당시에도 나라를 대표하는 건배주로 쓰일 정도였다.

이강주는 과거 문학작품에서도 언급된다. 조선후기 문인 화가인 경수당 신위(1769~1845년)가 43살에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편찬한 시 모음집인 <경수당전고>에서도 언급된다.

“10년동안 보지 못한 신순으로부터 역리통해 남쪽에서 편지가 왔네/(중략)이강주와 죽로차의 정취와 맛에 취하고 그림과 시문에선 오래된 인연 떠올리네…”

옛부터 조선 상위계층이 맛 좋은 이강주를 즐겨 마셨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강주 전통술의 선두주자

이강주는 조선의 3대 명주로 불리듯이 국내를 넘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조선 상류층의 약주답게 현재도 설·추석 등 명절에도 선물하는 등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

지난 2005년 고 노무현 대통령내외의 명절 선물로 이강주를 택했고, 2007년에는 고 노 전 대통령이 전국에 보내는 추석 선물로 당당히 선택되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도 전주 이강주를 설 선물로 낙점했다.

현재 시판되는 이강주는 증류식 소주 입장에서는 비교적 낮은 도수의 19도, 25도, 3년 이상 숙성한 38도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다. 19도의 이강주는 원래 수출용으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서울 강남이나 홍대, 광화문의 한식주점을 비롯해 전국 주요 백화점에도 입점해 어느 곳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

최근에는 온라인의 발전으로 누구나 인터넷으로 주문을 할 수도 있다.



△이강주 외에도 전통술 보존에 앞장

이강주가 현재의 위치를 되찾게 된 데에는 조정형 명인의 역할이 컸다. 중요무형문화재 6호로 이강주의 제조법을 체계화해 세계적인 명주로 만든 업적을 정부도 인정했다. 그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전통주들을 연구하고 개발하는데 평생을 바쳐온 전통주의 명인이기도 하다.

본디 이강주는 제조명인 조정형(65)씨 집안의 가양주였다. 명인 조씨의 6대조는 조선시대 완주부사를 지냈다. 집안에 민원인 등 손님이 많다보니 술과 음식을 준비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특히 술은 6가지 정도를 빚어 항상 대기시켜 놓았다.

이 가운데 가장 인기있던 술이 이강주였다. 맛이 좋은 데다 저장성 또한 탁월해 귀빈접대용으로 그만이었다.

집안 며느리들에게 전수돼던 이강주 제조비법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다 조 명인에 의해 1990년대에 복원돼 대표 전통주로 부활했다.

그는 과거 민속주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 후 옛 문헌에 나오는 향토주의 조사를 위해 전국을 누비는 술답사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전통주에 매력을 느껴서다. 전국의 도서관을 돌면서 민속주에 대한 문헌 자료를 수집했고, 특이한 민속주가 있다고만 하면 산골 오지나 조그마한 섬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각지에서 채집한 민속주 200종을 연구하며 직접 빚어보기도 했다. 1991년에는 전국을 돌며 조사,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 민속주를 집대성한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이란 책을 발간해 전통주 지킴이로 활약했다. 40여년 동안 모은 누룩틀, 도자기, 용수 등 요즘 쉽게 구경하기 힘든 술빚는 도구와 술잔 등 1400여점의 귀중한 유물을 모아 1993년 개관된 고천 박물관(주조전시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쓰여졌던 토고리, 누루틀, 무쇠솥, 장군총과 함께 술을 거르는데 쓰는 용수 등 삼한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귀중한 도구들이 소장돼있다. 특히 삼한시대에 사용된 각배(뿔로 만든 술잔)를 비롯해 백제-고려시대의 마상배등 희귀하고 특이한 술잔들도 보존되어 있다.

전북일보 최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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