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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율곡에게 길을 묻다]“장가드느라 성주 머물렀던 율곡 선생…지역 유생들의 기 잔뜩 꺾어 놔”

혼례 장소인 성주 성산관

 

 

경상북도 성주읍 경산리 286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성주 성산관은 조선시대 성주목의 목사가 공적인 일을 처리하던 관아 건물이다. 그런데 이곳이 463년 전인 1557년 9월 율곡 이이가 결혼한 장소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에게 장가를 든 율곡은 이후 동생 이우도 성주와의 인연을 통해 장가를 보내는 등 인연이 더욱 깊어진다.

1551년 음력 5월17일 어머니 신사임당이 별세한 후 율곡은 파주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3년 여묘살이를 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율곡은 이듬해 1554년 3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와 연을 맺는다.

신사임당은 죽으면서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소용없었다. 이원수는 부인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율곡의 큰형인 이선과 동갑내기 권씨를 후처로 들였다. 이 때문에 큰형 이선은 내내 새어머니와 다퉜고 율곡 선생 또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반항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율곡은 결국 그 답을 찾기 위해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금강산으로 사라진다.

1555년 봄, 1년 만에 속세로 돌아온 율곡은 강릉 외할머니집으로 향했다. 강릉에서 1년 동안 머물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 '자경문'을 짓고 다음 해 봄 서울 집으로 돌아오면서 5년간의 긴 방황의 길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율곡의 곁에는 평생의 친구인 우계 성혼이 자리했다.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온 율곡을 맞이한 아버지 이원수는 노총각이 된 아들의 결혼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성주에서의 율곡의 삶은 어떠했을까? 성주에서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이문건의 일기 묵재일기가 1990년대 세상에 나왔고 율곡 이이의 결혼 과정이 그 안에 상세히 기록돼 눈길을 모았다.

1535년부터 1567년까지 30여년 동안 쓴 이문건의 일기인 '묵재일기'를 보기 위해 성주이씨 종친회를 찾았다. 묵재일기에 이원수, 이이, 이선의 이름이 등장한 건 1557년. 그해 정월 1월1일부터 이원수는 큰아들 이선과 셋째아들 이이를 데리고 성주에 내려와 노경린과 만난다. 묵재일기에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저녁에 목사 노인부, 판관 김란종이 함께 와 만나서 죽청에 대화하였는데, 이원수가 와서 참석하였다. 전의 이름이 난수인데 산수를 잘 그리는 신씨의 남편이다. 신씨는 48세에 죽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이이가 문장에 능하다고 하였다.”

이원수는 아들과 함께 성주에 내려왔다가 열흘 뒤 이선과 이이만을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간다.

묵재일기에는 이후 이선과 이이가 꾸준히 등장한다. 종의 남편이 다리에 난 부스럼을 이이에게 가서 치료해 달라 편지를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5월 목사가 초청한 자리에 이원수, 이선, 이이가 참석해 술을 먹으며 시를 지었고 이이가 먼저 5자 4운을 바쳤는데 과연 뛰어났으며, 그의 형인 이선도 절구를 바쳤으나 이현배는 끝내 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런 기록때문일까? 성주의 향토사학자인 강희래씨는 “율곡 선생이 장가를 오느라 성주에 머무는 동안 성주 유생들의 기를 얼마나 죽여놨는지 여기서는 율곡 선생을 너무 똑똑해 잘난 척하는 이로 기억하고 있다”고 평했다.

'9도장원공' 율곡과 시문을 지으며 비교당한 선비들의 울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상원기자 jsw0724@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