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강원일보) [특집]“DMZ 깊숙이 감춰진 태봉국 철원성…남북 공동발굴 나서자”

2020 태봉학술회의

 

2020 태봉학술회의에서는 태봉국과 후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후삼국시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태봉국이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배경 등 그동안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출범 3년째를 맞은 태봉학회 소속 역사학자들이 참여한 이번 학술회의가 비무장지대(DMZ) 내에 절묘하게 자리한 태봉국 철원성의 남북 공동 발굴에 대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강원일보사와 철원군이 주최하고 태봉학회와 신라사학회가 주관한 2020 태봉학술회의는 최근 지역에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발제자와 토론자 등 최소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지난 20일 철원 한탄리버스파호텔 임꺽정홀에서 개최됐다.

[기조발제]“후삼국시대의 중심지 태봉 역사 재조명 필요”

△조인성 경희대 사학과 교수 '후삼국 시대의 개막'=역대 한국사 개설서의 시대 구분을 검토한 결과 후삼국사는 신라사에 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후삼국시대의 인식에 대한 설정은 새로운 시도로, 당시의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상호연관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아쉽게도 현 단계에서는 후삼국사 또는 후삼국시기라는 용어의 사용은 무방하지만 후삼국시대의 설정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삼국시대 설정의 시도는 궁예와 태봉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태봉국의 고구려 계승 표방과 태봉국·후백제·신라의 관계,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등의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함은 자명하다.

[제1주제발표]“신라 후기 김헌창의 난 지방통제력 약화 앞당겨”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 '신라 효공왕대 전후의 사회 분열과 호족'=신라 헌덕왕 14년(822)에 김헌창이 나라를 뒤흔들만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이 사건은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된 계기로 평가된다. 70년 뒤인 892년부터 농민과 초적의 무리를 세력 기반으로 두각을 나타낸 견훤과 궁예가 옛 백제와 고구려지역을 차지한다.

900년과 901년에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건국한다.

신라는 국력이 더욱 쇠약해져 겨우 나라의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후삼국이 들어서는 당시의 사회변동 양상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방법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제2주제발표]“대야성 함락시킨 견훤 백제 계승 정체성 확인”

△진정환 국립제주박물관 연구원 '견훤 세력의 등장과 후백제의 건국'=지금까지 후백제 건국에 대한 연구는 초기 세력 형성과 함께 후백제 말기의 세력 분열에 집중돼 왔다.

국가의 정체성과 정책, 문화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군사행동 등 대외정책 등의 연구도 필수적이다. 견훤은 백제로의 귀소의식이 강한 내부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대야성과 나주 공략 등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920년에 대야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 계승자로서 후백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건국의 당위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후 후백제 재지세력들은 익산을 중심으로 미륵사 개탑과 같은 의식을 설행하는 한편 백제 유적 정비 등 현창사업을 펼치게 된다.

[제3주제발표]“궁예 초기 세력기반은 불교 바탕의 사원세력”

△송은일 전남대 교수 '궁예의 초기 세력 기반과 후고구려 건국 과정'=궁예의 초기 세력기반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사원세력, 세달사가 자리한 영월과 그 인근 지역의 호족세력, 궁예의 외가와 관련된 신라 김주원계 후손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또 궁예가 처음 나라를 연 후고구려의 건국 과정은 명주 입성과 철원 진출, 패서호족세력과의 제휴, 건국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는 신분과 불교를 바탕으로 한 세력의 지원 등에 힘입어 강력한 군사력을 얻게 됐고 마침내 나라를 열었다.

궁예가 정치적 야망을 가지게 된 계기 등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제4주제발표]“미륵불 자칭했던 궁예왕 신정적 전제주의로 몰락”

△장일규 국민대 교수 '후삼국의 개막과 사상계의 동향'='미륵불'을 자칭한 궁예는 당시 만연한 말세의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정토불사의 설행을 통해 사회 혼란에 대한 왕실과 불교계의 대응을 적절히 이용한 인물이었다. 의상 화엄사상의 실천 신앙인 관음신앙과 아미타신앙을 모방만 하고는 석가정토와 미륵정토의 주체인 미래의 미륵불만을 부각하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냈다.

결국 자신만의 사상과 체제를 설정하고 유지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을 개벽의 주체인 '미륵불'로 칭하게 된다. 궁예의 이같은 사상은 신정적 전제주의의 추구로 귀결되며 추후 그의 몰락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토론]

이재범 “궁예-왕건 정권의 정치적인 차이 구체적으로 밝혀야”
신호철 “후삼국 관련 태봉학회-후백제연구회 공동 조사 필요”
박남수 “신라의 쇠퇴는 축적된 귀족사회 탐락·흉년·기근 때문”
신선혜 “철원으로 태봉국 수도를 옮긴 정치·군사적 이유 주목”
정재윤 “궁예와 태봉국을 이해하는 다채로운 연구방법론 제기”
홍성익 “강원도 지역은 한국 고대사→중세사 전환의 중심지”


△이재범 경기대 명예교수=이번 2020 태봉학술회의는 후삼국시대의 실체를 가릴 수 있는 학술회의였다고 생각한다. 후삼국시대는 신라정권에서 고려정권으로의 이행 과정이고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해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시대다. 후삼국시대 연구를 더 진행해 궁예정권과 왕건정권의 정치사회적인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야한다.

△신호철 충북대 명예교수=후삼국시대 설정은 어려우나 후삼국사는 엄연히 존재했다. 후삼국시대는 정치사회적으로 전 시대와는 분명히 다르며 지방분권적 측면에서도 차별화된다. 이제부터 후삼국시대를 분명히 선언하고 태봉학회와 후백제연구회가 공동으로 조사하고 연구했으면 좋겠다. 견훤의 후백제나 궁예의 후고구려 공히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뜻을 받들어 건국한 나라들이었다.

△박남수 동국대 교수=신라의 쇠퇴는 진성여왕 이전부터 축적된 진골귀족사회의 탐락과 녹읍을 지배하는 귀족, 국가의 부세 과중 등이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유리시켰고 진성여왕대에 흉년과 기근이 겹치며 농민 반란이 촉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지역의 호족들이 후삼국 각 세력으로의 이합집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신라 중앙정부에 직접 반발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을까에 대한 물음에는 향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신선혜 호남대 교수=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궁예는 896년 처음 철원을 도읍으로 삼고 2년 뒤인 898년 송악으로 옮긴다. 898년 송악으로의 이동은 효과적인 군사활동과 국가 경영을 위해서였다. 다시 철원으로 돌아오는 905년의 환도는 정치·군사적 입장 등 여러 이유가 내재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돼야 한다.

△정재윤 공주대 교수=진정환 연구원의 후백제와 관련한 문헌적·정치적 접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다만 이분법적 접근과 다소 무리해 보이는 논리도 엿보인다. 후삼국시대에 대한 다채로운 연구방법론이 제기되는 것 자체가 궁예와 태봉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홍성익 강원대 교수=후삼국시대는 분명 한국 고대사를 마감하고 한국 중세사로 전환하는 시점이며 강원도 지역은 그 중심에 있다. 궁예는 영월 태화산 세달사에서 출가해 왕이 되기를 서원했고 원주 치악산에서 군사를 집결해 강릉에 입성, 3,500명으로 군대를 편성해 세력을 규합했다. 이후 인제와 양구, 김화, 금성 등 강원 북부지역을 아우르고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했다.
 

정리=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