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광주일보)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나주 백호문학관

<16> 조선의 천재시인 백호(白湖)의 호방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2013년 개관…문학적 혼 품은 곳
유물·고문헌 등 옛것의 향기 발해
황진이 추모한 시 시대 초월 회자
시대 비판 “풍류기남아”라 불려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백호 임제문학관을 가기 위해서는 나주읍을 거쳐 영산강과 다시 들판을 지나야 한다. 강과 들을 거느리며 가는 길이다. 다시면은 곡창 나주평야를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다시(多侍)는 ‘삼백’의 고장으로 불리었다. 쌀, 누에고치, 목화가 다량으로 생산됐다. 영산강의 한복판으로 광주와 함평을 잇는 지리적인 요충지였다. 논과 논이 겹치고 들과 들이 겹쳐 평야를 이룬 이곳은 비옥한 농토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 때 수탈의 대상이 됐던 건 그 때문이다.
 

추수가 끝나는 이맘때면 근동에 산더미 같은 나락가마가 쌓였다. 기흥리에서는 기원전 1050년께로 추정되는 벼화분이 검출되기도 했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숭늉 같은 강물이 넓은 평야를 살찌웠던 것이다.

모든 곡창은 시간과 강의 합작품이다. 바람과 햇볕이 부조를 하고 농부의 피와 땀은 거름이 된다. 눈앞의 들녘은 오랜 시간 풍화와 수탈을 견딘 남도의 자랑이요 자부심이다. 단순한 수사가 아닌 자존과 품위를 간직한 나주의 자랑이다.

어디선가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라는 호방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다시면에 들어서면 넓은 들녘과 함께 그 사내의 결기와 거침이 없던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의 뛰어난 문장가 백호 임제(1549~1587)를 알현해야 하는 이유다.

 

 

 

백호는 명종 4년, 1549년에 임진(1526~87)과 남원 윤씨 사이에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癡), 벽산(碧山) 등의 별호가 있지만 ‘백호’(白湖)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87년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주 간에 늠름한 육척의 사나이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마음은 어리석어 육운의 병 면키 어렵고

지모는 졸렬하여 원헌의 가난도 사양치 않아.



풍진 속 벼슬살이야 잠깐 동안 굽힘이니

강해(江海)의 갈매기와 누가 잘 어울릴까

나그네 빈 방에는 밤마다 고향 꿈

다호(茶戶)며 어촌으로 옛 이웃들 찾아간다오.



(‘이 사람’ 전문)

문학관 전시실에서 만나는 백호의 시문은 가슴 한켠을 쏴하니 적신다. 이곳에는 임제의 생애와 작품이 시기별로 전시돼 있다. 백호문학관은 지난 2013년 4월 임제 선생의 고향인 다시면 회진리에 들어섰다. 이곳에선 어린이 글짓기, 백호 문학제를 비롯해 백호 선생의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문학관 외관은 전체적으로 세련된 구조이지만, 내부는 고전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유물과 고문헌 등에서는 옛것의 향기가 발한다.

그러나 백호, 하면 어떤 이들은 황진이를 떠올린다. 임제가 1583년 평안도도사로 부임돼 가는 길, 개성의 어느 청초 우거진 골짜기에서 무덤 하나를 본다. 황진이는 백호보다는 앞선 세대의 인물이지만 조선 최고 여류 시인이었다. 백호는 부임도 전에 황진이 무덤에 들러 추모를 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盞) 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이 일은 그의 발목을 잡고 만다. 후일 파직됐다는 설이 전해오는데 저간의 일화와 무관치 않다. 임제는 단지 문인으로서 황진이를 상정했던 것 같다. 문장가로서 문장가로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지난다 누엇난다’는 ‘청구영언’에 전해오는데, 우리 문학사를 풍성하게 만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백호의 출사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다. 1576년(선조 9) 진사에 급제했으니 당시 나이가 만 27세였다.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에 배수됐다. 이후 흥양현감, 서북도 병마평사, 관서 도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당쟁에 얽히는 것을 원치 않아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문학관 곳곳에는 임제의 생애와 문학적 혼이 숨 쉰다. ‘임제(1549~1587)’라고 적힌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부착돼 있다. “백호 임제는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라 일컬어졌다”

백호는 너무 큰 그릇이어서 시대가 품기에는, 아니 그 시대를 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허균·양사언 등은 백호의 문재와 기백을 알았다. 허균 등은 당대 필명을 날렸던 문사다. 그 같은 이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은 백호의 문장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물론 허균 또한 당대 사회와 불화해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을 견뎌야 했다.

성운(1497~1579)은 백호 임제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이다. 역사적 기록에는 임제가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돼 있다.

문학관에는 백호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과 자료가 비치돼 있다. ‘백호시선’에서 봤던 문장들도 만난다. 벼슬을 집착하지 않는 이의 자유와 기상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오늘의 정치인들은 한번쯤 백호의 자유와 무애의 경지를 접했으면 싶다. 더 많은 것을 쥐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백호의 정신은 죽비처럼 다가온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