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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9) 유기수, 최초의 의사 출신 작가

체험적 소설로 세계관과 역사관 재조명

유기수(1924-2007)는 정읍시 태인에서 태어났다. 태인보통학교를 마치고 194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평생 의사로 살았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남북의 대립과 갈등, 민주화의 열망이 가득했던 시대를 살아왔다. 대학 재학 중에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군의관으로 차출되어 중국 대륙에서 전쟁터를 누비고 다녀야 했다. 해방 이후,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의 군의(軍醫)로 징발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런가 하면 9.28 수복 이후에는 인민군에게 부역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고, 곧 풀려나서는 국군의 군의관으로 중부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이렇듯 선생의 인생 전반부는 격랑의 소용돌이였다. 일본군에서 인민군으로, 다시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전전함으로써 그의 삶은 20세기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삶과 죽음의 극한 상황을 거듭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만주 벌판에 비는 자꾸 구지고

부상병들은 야영에 울고



우리는 벙어리부대

이역만리에서

소리 없이 아, 소리 없이 노래를 불렀다.



누구를 위한 대열이기에

<하르빈> 참호를

붉은 피로 물들여



외인부대

무장 없는 병정들의

아리랑을 들어라.



-징병이었다.

-학병이었다.



동인성 만주 땅에

오붓이 모여

종소리 아득한 속에

서로 이름 부르며

신의주로 가는 길은 젊기도 했다.

-「외인부대」 전문 『공백의 장』(정음사. 1958)



이 시는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만주로 끌려가서 관동군의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쓴 시로,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는 학병으로, 의병으로 끌려와서 하르빈 참호를 붉게 물들여 가는 전쟁의 비극성과 무의미성이 드러난다.

그 후, 선생은 전주로 낙향하여 ‘유기수 산부인과’를 개업하면서부터 전쟁과 역경 속에서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소설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이름을 딴 병원도 호황을 누렸지만, 선생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끊이지 않은 갈증처럼 오래가고 깊어지기 시작했다. 선생에게 문학은 지난날의 청춘을 보상받을 수 있고, 청년기의 가슴 아픈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최선의 안식처가 되었다. (『전북작가열전』 최명표, 신아출판사) 196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호로박사」가 당선되면서 선생은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었다. 이 작품은 장편으로 개작되어 1977년 6월부터 『전북신문』에 연재되기도 했지만, 의사들의 반발을 사면서 필화사건을 겪어야 했다. 이는 문학작품이 갖는 허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해프닝이었지만, 작가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했다.

선생은 필연적으로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것 같다. 시대와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살아온 선생의 삶은 그대로 한 편의 소설이 되기에 충분했다. 선생이 현장에서 체험한 사건들은 특별한 서사구조를 갖춘 완벽한 이야기가 되었다. 『인간교량』을 비롯하여 『지리산 사람들』, 『북에서 온 기러기』, 『벽소령 가는 길』, 『두만강 칠백 리』, 『지리산에 핀 꽃은 시들지 않는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들은 당대의 삶의 애환과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증언하는 데 손색이 없다.
 

 

문덕수 교수는 “유기수는 소설을 펜으로 쓰기 전에 먼저 발로 쓰는 작가다.”라고 하였다. 자신의 체험을 확인하기 위하여 현장을 답사하고, 다시 역사적 제재를 찾아 그 현장을 발로 뛰면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유기수 소설가의 특별함은 그가 최초의 의사 출신 작가라는 점도 한몫했다. 선생은 도규계(刀圭界)에서 성공한 의사이기도 했지만, 문학계에서는 특별한 체험과 서사구조를 통해서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했다.

임헌영 선생은 그의 문학을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했다. 하나는 진솔하게 실화를 기록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체험적 소설을 통해서 당시의 ‘민족관, 세계관, 역사관을 재조명했다는 점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울분과 분노, 희생 또는 가학행위 등을 통해서 좌우 이념의 편향적 시각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즉, 변증법적 역사의 순리에 따른 세계관과 인생관의 변모를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6.25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전북문단 재건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시원(詩園)』 발간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당시 도내에서 발간된 신문에 ’유림일(柳林一 )‘이라는 필명으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전북 문단을 이끌었다. 전북문인협회 이사로 김해강을 보필했고, 표현문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민족통일문학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에 취임하여 1998년 북한 동포 책 한 권 사보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선생은 한국의 안톤 체호프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고 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안톤 체호프는 의과대학에서 수준 높은 정규교육을 받은 의사이면서 단편소설에 몰두하며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이며 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선생은 의사이면서 사실주의적 단편소설을 많이 썼다는 점에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선생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역사의 뒤편에서 신음하던 군상들의 설움과 분노, 한탄과 아픔을 다루었다. 특히 지리산과 관련된 당대의 비극을 자주 언급하였는데, 이는 지리산의 화해 없이는 남북 대화도, 조국 통일도 없다는 작가적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지리산의 저편에서 자신과 동질의 정서를 소설화한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와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우정을 다졌다. 선생은 작가로서도 훌륭하였지만, 개업 의사로서도 유복한 삶을 누렸다. 대한의학협회 부회장, 대한산부인과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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