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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3세기 중엽 이전 만주 최강국 '부여'…고구려·백제·왜까지 영향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

 

 

남시베리아 탁리국 왕족 출신 동명왕이 지린-창춘 지역 토착 예족 통합·흡수 후 건국
동아시아 역사에 고조선보다 긴 그림자…쑹화강 유역에 충남 '부여'와 같은 이름 존재
3세기 이후 모용선비·고구려에 자주 공격당해…망국 이후 지배층 대부분 고구려 이주


중국 진·한(秦漢) 교체기인 기원전 3세기경 남시베리아 탁리국( 離國) 왕족 출신 동명왕(東明王)이 무리를 이끌고 남하, 쑹화강(松花江) 유역 지린-창춘 지역 토착 예족(濊族)을 통합, 흡수해 부여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 금관가야, 그리고 왜(倭)에까지 영향을 미친 동아시아의 게르만(German) 700년 부여의 시작이었다.

# 동명왕 이야기서 드러난 사실

1세기 동한(후한) 왕충이 지은 '논형(論衡)' 길험편에 의하면, 서한(전한)과 흉노 간 갈등이 첨예화되던 기원전 3세기경 탁리국 출신 동명왕이 무리를 이끌고 북만주로 남하, 쑹화강(숭가리) 유역 예족을 흡수해 부여를 세웠다 한다. 농경사회를 대표하는 한(漢)과 유목사회를 대표하는 흉노가 전쟁과 교류를 통해 남시베리아-북만주에까지 자극을 준 결과였다. '탁리'는 '텡리 또는 텡그리(Tengri)'를 음차(音借)한 것으로 부여의 원류는 텡그리(하느님)를 신봉하는 남시베리아의 한 부족이었다. 부여는 물론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도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鄒牟)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강림한 해모수(解慕漱)로 알려진 데서도 알 수 있다. '해(解)'는 음차로 우리말 '해(히·태양)'를 뜻한다. 부여의 주류 부족이 외부에서 이주해 왔다는 것은 부여 건국설화 '동명왕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동명왕 설화는 남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 일파의 북만주 방면 남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부여는 (고)조선보다 동아시아 역사에 더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고, 고구려에서 백제가 잉태됐으며, 백제는 왜와 연결된다. 금관가야도 부여의 영향을 받았다. 선양(瀋陽)과 창춘 사이에 금강 유역 '부여(扶餘)'와 동일한 이름의 도시 '푸위(扶餘)'가 있다. 왜 금강 유역 부여로부터 북쪽으로 1,600㎞ 넘게 떨어진 쑹화강 유역에도 '扶餘'라는 도시가 있는 것일까?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함양(咸陽)은 통일신라 이후 각각 중국 후베이성의 장링(江陵)과 샹양(襄陽), 싼시성의 셴양(咸陽)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충남의 도시 부여는 부여의 원류가 되는 탁리국 출신 무리가 남시베리아에서 출발해 쑹화강과 압록강, 한강을 거쳐 금강 유역까지 3,000~4,000여㎞에 걸친 이동의 결과 생겨났음이 분명하다. 남시베리아-북만주에서 기원한 부여족이 쑹화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 각기 '扶餘'라는 이름의 도시를 남긴 것이다. 부여,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남부여)도 '동명왕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기원전 1세기 말 부여를 이탈한 한 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의 아들'로 알려진 추모를 지도자로 랴오닝성 동부 환인 지역으로 남하, 맥계(貊系) 원주민을 흡수해 오녀산성이 자리한 졸본(Chorbon·'금성'이라는 뜻의 고대 터키어)을 근거로 고구려를 세웠다. 고구려의 수도가 'Chorbon'으로 불렸다는 것은 고구려에 원시 터키적 요소가 포함돼 있음을 말한다. 중앙아 내륙 터키계 국가인 키르키즈 소재 함호(鹹湖) 이시크쿨 호반에는 'Chorbon' 명칭의 도시들이 있다. 추모의 부하들 가운데 '오이'는 고대 터키어로 '달(moon)', 그리고 '마리'는 '우두머리(head)'를 뜻한다. 고대 터키계 돌궐제국(突厥帝國)은 고구려를 뵈클리(Bokli)로, 티베트계 토번(吐番)은 무쿠리(Mukuli)로 불렀다. '맥인(貊人)의 나라'라는 뜻이다. 고구려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춰 나가는 과정에서 추모의 후처(後妻)로 알려진 소서노와 의붓아들(친아들이라고도 한다) 비류, 온조가 이끄는 세력이 이탈했다. 이들은 압록강 하구에서 서해 뱃길을 타고 내려왔다가(한반도 북부 지역 강을 건너왔다는 소수설도 있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 송파 일대와 인천 일대를 점거하고 '100개의 나루(항구)를 가진 나라('百家濟海'에서 유래했다는 등 10개 이상의 다른 주장도 있다)'라는 뜻의 백제(百濟)를 세웠다. 기원전 1세기 말 무렵 대동강, 예성강 유역에는 낙랑군 포함 한족 세력이 건재하고 있어 대규모 집단의 육지 이동은 어려웠을 것이다.

'온조'가 바로 '백제'라는 견해도 있다. 우리말 '온'은 '백(百)'을 가리킨다. '삼국사기'와 '삼국지' 등 한·중 역사서들은 랴오둥을 근거로 하는 일단의 예맥계(濊貊係) 세력이 한강 유역으로 들어왔다 한다. 사서들은 백제의 기원을 온조설과 비류설, 우태설 포함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 강력한 군사력 자랑

서진(西晉) 진수가 지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부여는 '초기에는 어느 나라에게도 패해 본 적이 없다' 한다. 다링허(大凌河)-랴오허 유역 모용선비(慕容鮮卑)와 압록강 유역 고구려가 융성하기 시작한 3세기 중엽 이전까지 부여는 만주 최강국이었다. 부여는 보기(步騎) 몇 만을 동원해 다링허 유역으로 진출, 고구려군이나 동한군(후한군)과 싸울 정도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부여왕이 121년 12월 왕자 위구태로 하여금 2만 대군을 인솔해 고구려 태조왕 군대에 포위된 동한의 현도성을 구원했다 한다.

부족국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약화되던 부여는 3세기 이후 모용선비와 고구려에게 수시로 공격받았다. 부여는 285년 다링허 중류 용성(차오양)을 수도로 하는 모용선비 수장 모용외(慕容 )의 침공을 받아 국왕 부여의려(扶餘依慮)가 자결하고 1만여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다. 잔여 일부 세력은 두만강 하류 북옥저로 이동해, 그 지역을 부여화했다. 부여는 서진(西晉)의 지원으로 겨우 나라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60여년 뒤인 346년 부여는 모용외의 손자(모용황의 아들) 모용준, 모용각 등이 이끄는 모용선비군 1만7,000기의 재침을 받아 수도가 함락당하고, 국왕 부여현(扶餘玄) 포함 5만여명이 포로가 돼 용성으로 잡혀가는 등 사실상 멸망했다. 모용황은 부여현을 부마로 삼았다. 모용선비의 포로가 된 5만여 부여인 중 일부가 탈출해 랴오허, 다링허 흐름을 타고 내려가 서해를 지나 낙동강 하구 김해까지 도망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선진 문물을 가진 부여인의 합류로 강성해진 김해의 금관가야는 399년(나물마립간 재위기) 왜와 연합해 신라 수도 금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최근 차오양 베이퍄오(北票) 라마동에서 부여인 집단묘지가 발견됐다. 4세기경, 다른 무덤을 파괴하고, 그 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김해 대성동 91호 고분에서 발굴된 △'청동 띠 그릇' △'동복(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이동식 냄비)' △'말안장' 등은 라마동 집단묘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똑같이 생겼다. 라마동 집단묘지와 대성동 91호 고분은 양식도 같다. 대성동 88호 고분에서는 왜국(倭國)과 연결되는 파형동기(波形銅器)도 발굴되었다. 가야, 적어도 금관가야는 야요이계와 부여계 그리고 중국화된 인도계(허황후)가 결합된 나라가 아니었을까?

저족( 族) 전진(前秦) 황제 부견이 파견한 왕맹이 370년 11월 모용선비 전연(前燕)의 말기 수도인 허베이성 소재 업( )을 점령할 때 고구려·갈족 인질들과 함께 성문을 연 부여울(扶餘蔚)은 부여현의 아들 중 하나로 보인다. 부여울은 조국을 멸망시킨 전연에 대한 반감과 함께 전연 황자 출신인 장인(丈人) 모용수가 전진에 망명해 있었기 때문에 전진군이 업을 공략할 때 고구려ㆍ갈족 인질을 모아 내응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울은 전진과 동진(東晉) 간 383년 비수전투 이후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세우자 후연에 합류, 고구려인들의 집단 거주지이던 뤄양 부근 형양 태수로 임명됐다. 형양의 고구려인들은 245년 위나라 관구검의 제2차 고구려 침공 시 포로가 돼 끌려갔던 이들의 후손이다. 부여울은 나중 정동장군 부여왕에 봉해졌다. 부여가 재건됐다. 재건된 부여는 읍루( 婁)에 이어 물길(勿吉)과도 싸워가면서 494년 문자왕(文咨王) 시기 고구려에게 멸망당하기까지 100년 이상 더 나라를 유지했다. 망국 이후 지배층 대부분은 고구려로 이주했다. 부여의 흔적은 쑹화강 상류 백금보-한서2기 문화와 지린의 서단산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옛 땅에 잔류한 부여인들은 하얼빈을 중심으로 몽골계와 힘을 합쳐 '두막루(豆莫婁)'를 세웠다. 두막루(달말루)를 국토회복주의, 즉 '다물(多勿)'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두막루는 230여 년간 나라를 이어 가다가 726년 발해(後高麗) 2대 무왕에게 멸망당했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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