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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뱃놀이에서 탄생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유럽 인문학 기행-영국] 옥스퍼드 ‘앨리스 상점’

“찰스 아저씨, 뭐하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에 떴단 말이에요.”

 

찰스 러트위지 다지슨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꼭두새벽부터 누구일까 싶었다. 다지슨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비비며 시계를 봤다. 시계바늘은 9시를 향해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그는 ‘오늘은 일요일인데’ 라며 몸을 일으켰다.

 

다지슨은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 하숙방 문을 열었다. 밝은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은 뒤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찰스 아저씨, 오늘 뱃놀이 가기로 한 것 잊으셨나요? 빨리 씻고 옷 입으세요.”

 

 

다지슨은 눈을 비비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조그마한 꼬마 아가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얼굴은 주근깨 투성이라서 언뜻 보기에 대단한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꼬마 뒤에는 한두 살 씩은 더 돼 보이는 여자 아이들이 웃으며 서 있었다.

 

“앨리스 리델, 너였구나! 아침부터 남의 집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꼬마숙녀가.”

 

“오늘 아침에 뱃놀이 가자고 지난주에 약속하셨잖아요. 어서 서두르세요. 이러다가는 배를 타기도 전에 해가 지고 말겠어요.”

 

“오~호~. 아직 낮 12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곧 해가 진다고? 앨리스의 허풍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구나. 하하. 알았다. 조금만 기다리렴. 얼른 세수하고 옷을 입고 나갈게.”

 

 

■ 템스 강의 뱃놀이

 

다지슨은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세 꼬마 숙녀는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의 헨리 리델 학장의 딸들이었다.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다지슨은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리델 학장과 친분이 두터워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그래서 학장의 딸들과도 매우 친했다. 그는 원래 말을 심하게 더듬는 편이었는데, 학장의 딸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희한하게도 전혀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애들을 만나는 게 즐거웠다. 앨리스는 열 살로 가장 어렸고, 나머지 두 아이들은 앨리스보다 한두 살이 많은 언니들이었다.

 

다지슨은 1주일 전 학장 집에서 학장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다 다음 일요일에 템스 강으로 뱃놀이를 데려가겠다고 학장 딸들에게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전에도 몇 번 아이들에게 뱃놀이를 시켜준 적이 있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오후에나 강에 갈 생각이었지만, 어린 아이들은 아침 샛바람에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다지슨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옥스퍼드 교외에 있는 폴리교로 갔다. 배는 그 다리 아래에 묶여 있었다. 그렇게 큰 배는 아니었지만 다지슨 자신과 세 아이들이 타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다지슨은 힘껏 배를 저었다. 배는 천천히 템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신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앨리스는 강물을 만져보려고 손을 배 밖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손이 강물에 닿기에는 키가 너무 작았다. 다지슨은 웃으며 말했다.

 

“앨리스, 그러다가 강에 빠진다. 아저씨는 수영을 못해서 네가 빠지면 건져줄 수가 없단다.”

 

7월 날씨치고는 햇살도 매우 뜨거웠다. 바람도 제법 선선하게 불어왔다. 햇볕에 노출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아이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지슨은 배를 강변에 대고 좀 쉬면서 아이들에게 샌드위치를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배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앨리스가 졸라대기 시작했다.

 

“아저씨, 배만 타니까 너무 지겨워요. 졸리기만 해요. 오늘도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너무 아침 일찍 서둘러서 그래. 잠을 충분히 자고 오후에 나왔으면 햇살도 덜 뜨거웠을 텐데….”

 

“아저씨, 그렇게 말을 돌리지 마시고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세요.”

 

앨리스와 두 언니가 서로 입을 모아 합창하듯이 다지슨을 졸랐다. 다지슨은 아이들과 뱃놀이를 나오면 이렇게 강변에 배를 세워놓고 직접 지어낸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나 하고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문득 좋은 줄거리가 머리에 떠올랐다.

 

“좋아, 오늘은 아저씨가 독창적으로 만든 환상의 여행 이야기를 해주마. 딴 생각하지 말고 잘 들어 보거라. 이야기 도중에 재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얼른 말을 하도록 해라. 그래야 나도 편하니까. 하하.”

 

“야! 신난다.”

 

다지슨은 험험 하고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잠시 먼 산을 바라보며 뜸을 들인 뒤 말을 꺼냈다.

 

“앨리스는 언덕에서 하는 일도 없이 언니 옆에 앉아 있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했단다.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한두 번 슬쩍 들여다봤더니 그림도 대화도 전혀 없는 책이었어.”

 

 

다지슨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이야기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히힛 하고 웃음을 참지 못하며 몸을 비비 틀었다.

 

“앨리스, 조용히 해. 아저씨가 이야기에 집중을 못하시잖아.”

 

“알았어. 언니. 미안해.”

 

다지슨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테나 여신에게 베 짜기 도전을 했다 거미가 돼버린 아라크네의 입에서 실이 풀려나오는 듯했다. 30여 분 동안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다지슨은 잠시 말을 멈췄다.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이야기는 다음 뱃놀이 때 하도록 하자꾸나.”

 

“안돼요.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아직 잠자러 갈 시간도 아니잖아요. 말대꾸도 안하고 숨도 안 쉬면서 아저씨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잖아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아이들의 성화가 이어지자, 다지슨은 허허 하고 웃은 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알았다, 알았어. 너희들 등쌀에 내가 못 살겠다.”

 

다지슨은 다시 흐흠 하고 목을 고른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앨리스는 토끼 굴에 빠지고, 하얀 토끼와 여왕을 만나고, 도도새와 모자장수도 만났다. 도저히 즉석에서 튀어나온 이야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두 시간이나 이어져서야 끝이 났다.

 

“앨리스는 일어나 힘껏 달려가면서 자신이 꾼 이상한 꿈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끝~.”

 

다지슨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앨리스와 두 언니는 환상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날의 추억이 끝난 게 아니었다. 세 소녀는 집에 돌아가서도 다지슨이 들려준 이야기의 여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손발을 씻으면서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서도 줄곧 다지슨의 이야기만 생각했다. 세 소녀는 그날 밤 다지슨이 설명한 토끼 굴에 떨어져 환상여행을 직접 즐겼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뱃놀이를 다녀오고 며칠 뒤의 일이었다. 다지슨은 집에서 공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일 학교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르칠 교재였다. 학생들 앞에서는 말을 많이 더듬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미리 수업 교재를 꼼꼼하게 챙겨놓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똑똑.”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다지슨은 펜을 놓고 문을 열었다. 뜻밖에 문 앞에는 앨리스가 혼자 서 있었다. 장난꾸러기답지 않게 아주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니, 앨리스. 이 시간에 네가 여기 혼자서 웬 일이냐?”

 

“아저씨,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곰곰이 생각했다니, 무엇을 말이냐?”

 

“지난번에 뱃놀이 갔을 때 해주셨던 앨리스 모험 이야기 있잖아요.”

 

“응, 그 이야기가 왜?”

 

“그 이야기를 글로 적어 책으로 내시면 안 될까요?”

 

“책으로?”

 

“네, 그래서 제게도 한 권 선물로 주시고, 다른 아이들도 재미있게 읽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앨리스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온 다지슨은 생각에 잠겼다.

 

‘뱃놀이에서 아이들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고…? 이야기책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내가?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내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다지슨은 책을 출간한 뒤 재미없다는 혹평을 받을까 두려웠다. 학교에서 논리적인 사고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것은 동화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고민했다.

 

‘그래! 책을 내자! 세 아이가 재미있다고 했으면 다른 아이들도 좋아할 거야. 그 아이들은 내 인생의 방향타이니까 말이야.’

 

다지슨은 그날 이후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집에 돌아오면 글을 썼다. 뱃놀이에서 아이들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더듬어 생각해내 정리했다. 희한하게도 그날 했던 이야기는 아주 쉽게 글로 소화됐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책을 완전히 정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는 2년 뒤 성탄절에 앨리스에게 책을 선물했다. 책에는 이런 제목을 붙였다. <지하세계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Underground)>. 이런 글도 함께 적었다. ‘여름날을 기억하며 앨리스 리델에게 주는 선물.’

 

 

다지슨이 그때 낸 책은 정식으로 출간한 게 아니었다. 간단히 묶어낸 문집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는 수 년 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된 책을 출간했다. 제목은 이렇게 바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그는 필명도 새로 지었다. 바로 ‘루이스 캐롤’이었다.

 

옥스퍼드 세인트 알데이츠 거리를 걷다보면 한 가게 앞에 긴 줄이 서 있는 걸 보게 된다. 바로 ‘앨리스 상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관련 기념품을 파는 곳이다. 이제 사람들은 옥스퍼드라고 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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