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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코로나도 무너뜨리지 못한 '희망'

대전 오정농수산물시장 영하의 칼바람에도 활기
상인들 "희망 잃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날 올 것"

 

눈짓과 손짓이 쉼없이 오가는 전쟁터였다. 보고 만지고 '이거다' 싶으면 버튼을 누른다. 물건 앞에 줄지어선 행렬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일사불란하면서도 제각각이었다. 선택받은 것들은 빠르게 옮겨졌다. 세 바퀴 크고 작은 전동 오토바이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상품 사이사이를 용케 비집고 다녔다. 정제되고 질서있는 혼돈이었다. 코로나19 3년차에도 먹고 살기 위해, 내일의 희망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1년 365일 이른 새벽녘에 나와 밤낮이 뒤바뀐 줄도 모른 채, 하루를 굳건히 버텨 내고 있는 그들의 치열한 전장(戰場)에서는 바이러스조차 발붙이지 못할 듯싶었다.

 

세밑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27일 0시쯤 대전 대덕구 오정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향하는 횡단보도는 쌩쌩 불어닥치는 영하의 칼바람에 황량했다. 하지만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영 딴판의 세상이 펼쳐진다. 전국 산지에서 올라온 따끈따끈한 채소류가 가지런히 쌓여있다. 1987년 11월 전국에서 두 번째 규모를 갖춰 문을 연 오정농수산물도매시장은 2009-2013년 시설현대화를 거쳐 연면적 4만 4547㎡(부지 7만 854㎡·2만 1433평)의 공영도매시장으로 거듭났다. 현재 농협경제지주㈜대전공판장, 대전청과㈜, 한밭수산㈜ 등 3개 법인이 입주해 354명의 중도매인이 영업 중이다. 올해(11월말 기준) 2632억 원 상당의 채소류 15만 4766t, 과일류 4만 6022t(1394억 원), 수산물 2980t(219억 원)이 팔려나갔다. 전국 32개 공영도매시장 중 9번째로 큰 거래량으로 하루평균 8000여 명의 대전·충청·호남권 상인과 주민들이 찾고 있다.

 

상추 깻잎 같은 엽채류를 주로 하는 중도매인 김윤태(46) 씨는 이날 0시 30분 경매를 앞두고 물건 고르기에 한창이었다. 박스 포장을 뜯어 상품을 살펴보고는 생산자 이름을 적었다. 사야 할 물건이다. 경매시간이 다가오면서 중도매인들이 모여들고 경매사는 상품정보를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좋은 상품을 사들이기 위한 한판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바로 옆에서는 고추에 이어 깻잎순 경매가 시작된다. 중도매인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연신 응찰기를 눌러댔다.

 

김 씨는 "일단 물건을 볼 줄 알아야 응찰기를 잡을 수 있다. 10년 가까이 걸린 것 같다"며 자신의 생을 한 줄로 요약했다. 또 "코로나가 터지기 전 이 일을 시작해 3년이 넘었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을 잘 건사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건 없다"고 했다.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유금례(70) 씨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김 씨의 모친이자 이 시장에서 30년을 보낸 베테랑이다. 남편(77)과 "죽어도 여기서 죽자"는 생각으로 버텨온 세월이다. 유 씨는 어깨에 메고 있는 오래된 3단 돈주머니를 들어 보이면서 "이 돈주머니가 몇 개째인지 모르겠다. 닳고 닳으면 하나씩 샀다. 내가 가방끈 긴 박사는 아니지만 희망을 갖고 열심히 부지런히 살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 온다"고 웃으며 말했다.

 

새벽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이날 오전 3시. 시장 뒤편 서류동에서는 누런 흙먼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감자나 고구마 등을 일컫는 서류(薯類)가 주요물품인 까닭이다. 시장밥 36년의 터줏대감 최선기(63) 중도매인은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상품을 정리하고 틈틈이 경매에도 나갔다. 그렇게 한세월 한눈 팔지 않고 일하다 보니 어느새 직원 13명을 둔 잘 나가는 중도매인이 됐다. 최 씨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사가 잘돼 신명나게 일한 적도 있고 기상악화와 작황부진 등 인력으로 안 되는 변수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도 많았지만 결국 다 이겨냈다"고 했다. 이어 "코로나가 새해면 3년째 접어드는데 나와 가족, 주변 동료들 모두 건강하게 일하고 있다는 게 행복한 것 아니겠느냐"며 "우리들의 일터 시장 역시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그간 유지해온 시스템대로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을 볼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문승현 기자 starrykite@daej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