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여기였어요. 건물로 들어가는 계엄군들을 보면서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을 지키려고 남았는데, 무장한 계엄군들을 막상 맞닥뜨리니 너무 무섭고 공포심이 들었어요.”
11일 찾은 옛 전남도청 별관 앞. 1980년 5월 시민군으로 도청에 남았던 오기철(62)씨는 도경찰국 본관 건물과 맞닿은 공간 바닥에 직접 몸을 눕혔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으로 진입하던 당시 자신이 계엄군 시야를 피해 숨어 있던 위치였다.
오씨는 건물 벽과 계단, 빛이 비추는 방향까지 손으로 짚어가며 “여기 바닥에 붙어 있으면 저쪽에서는 안 보였다. 본능적으로 거기에 숨었던 것 같다”며 “총을 쏠까 고민했지만 한 발 쏘는 순간 위치가 드러나 집중 사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오씨는 최후의 항쟁 일주일 전인 5월 21일, 광주공원 계단 앞에서 시민군에게 무기를 배분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청 안팎을 오가며 총기 회수를 알리는 방송을 했고, 양동과 서방 철도 건너편 장의사들로부터 관을 가져오는 일에도 참여했다.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 재진입 작전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던 그다.
오씨는 당시 16세에 불과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목수로서 일하며 목공장 인근의 군인들에게 총기 조작법을 배웠었다고 한다.
자신이 시민들에게 총기 작동 여부를 확인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어보인 오씨는 “오발 사고를 막기 위해 총을 작동해 본 사람에게만 줬다”며 “군대를 다녀왔거나 최소한 조작할 줄 아는 사람인지를 보급 전에 확인했었다”고 했다.
오씨에게는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시신이 놓였던 공간과 차량이 드나들던 방향까지 눈에 그리듯 선하다는 것이다.
이날 복원된 옛 전남도청에서 그는 건물 앞 정문에서 마당 은행나무를 지나 본관 아래로 이어지는 길 사이 차량 진입 방향을 손으로 짚어 가며 기억을 되새겼다. 정문 쪽에서 시신 운반 차량이 들어오면, 시민들이 쪽문을 통해 시신을 확인하러 들어오고,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입관 뒤 상무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또 미확인 시신은 도청 본관 아래 한 켠에 놓아 두고 가족을 찾는 시민들이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는데, 사망자가 물밀듯이 쏟아지다 보니 시신이 한때 30여구까지 쌓이기도 했다고 한다.
옛 전남도청은 오씨에게 ‘최후의 날’ 기억을 되살리기도 했다. 당시 그는 쳐들어오는 계엄군을 피해 경찰국 건물 뒤편으로 피신, 황금동 방향으로 빠져나가려 했었다.
다른 시민군들이 건물 내부와 차량 주변, 계단 아래 등에 몸을 숨긴 채 계엄군 움직임을 살피고, 일부는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는 “살아남은 사람 7~8명이 함께 이동했다”며 “머리를 숙이고 이동하라고 했는데 한 사람이 고개를 드는 순간 위치가 노출됐다”고 돌아봤다.
이후 계엄군에 체포돼 고개를 숙인채 차량에 탑승한 뒤 상무대로 끌려갔던 오씨는 “손을 뒤로 묶인 채 엎드린 상태로 밤새 맞았다”고 회상했다. 오씨는 “그때는 아픈지도 몰랐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는 공포만 있었다”고 말끝을 흐렸다.
오씨는 복원된 옛 전남도청을 돌아보며, 한편으로 ‘트라우마’에 몸서리가 쳐졌다고 했다. 자신뿐 아니라, 46년 세월 동안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 온 이들의 마음도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리라는 마음도 커졌다고 한다.
오씨는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수없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가족을 위해 지금까지 버텨온 사람들이다”며 “5·18 정신 계승을 말하기 전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