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인화(70)씨는 46년 전인 1980년 5월 27일 옛 전남도청 맞은편 상무관 옆에서 공포를 이겨내며 보초를 섰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엄혹했던 1980년대 국자 대신 총을 들었던 ‘요리사 보초병’ 이었다.
13일 도청 앞에서 만난 양씨는 상무관에서 도청 정문까지 광장을 가로질러 걸으며 “이렇게 1분이면 오는 거리가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올때마다 생생하게 그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순천 출신의 양씨는 당시 서구 운천동 상무대 인근 중국요리집 ‘황하식당’ 주방장이었다. 짜장면과 짬뽕을 만들던 웍을 내려놓고 도청으로 뛰어간 게 1980년 5월 20일이었다.
광주 시민들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택시를 타고 홀로 양동시장으로 향했던 그는 시민들이 젊은 사람들을 붙잡고 “앞에 나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던 모습을 목격했다.
이후 21일 태극기에 덮인 시신들이 금남로로 들어오는 모습을 본 후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양씨는 그날부터 시민군으로서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여하게 됐다.
도청에 머무르며 낮에는 궐기대회에 참여하고 밤에는 보초를 섰던 그가 기억하는 당시 광주는 하나의 ‘공동체’였다.
그는 “거리마다 나와서 밥도 해놓고 빵도 내놓고 그랬다. 네 것, 내 것이 없이 모두가 하나였다”며 “사실상 무법상태에 치안도 마비된 상황이었는데 시민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켰다. 모두가 옆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26일 밤 다시 도청으로 들어가기 전 양씨는 상무동에 있던 이모 집으로 걸어가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속옷까지 새로 갈아입었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모습일 거라는 생각에서다.
당시 서랍에서 신분증을 챙겨 나오면서 이모에게 “혹시 죽으면 부모님이 시신이라도 거둬갈 수 있게 연락해주라”고 말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27일 새벽 양씨는 상무관 옆 경찰 철망차량 안에서 시민군들과 함께 보초를 섰다가 가장 먼저 계엄군이 2명이 담을 넘어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곧바로 다른 시민군들에게는 “빨리 도망가라”는 말을 전했다.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있던 그는 적발된 후 실탄을 차량 밑에 숨기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이후 욕설과 함께 “빨리 안 뛰어와”라는 소리가 귀에 내다 꽂혔다.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을 지켰던 그였지만, 계엄군에 붙잡힌 순간은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만큼 끔찍했다. 그는 도청 안으로 끌려가 바닥에 엎드린 채 구타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청색 잠바 등에는 빨간 마카펜으로 ‘극렬’이라는 글씨가 적혔다. 계엄군에게 잡혀 상무관에서 도청 정문까지 걸어오던 짧은 순간이 그에게는 영원처럼 길었다고 한다.
이후 상무대로 연행된 뒤 갖은 폭행과 물고문을 당한 양씨는 1980년 10월 24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럼에도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은 게 늘 미안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회복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무겁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양씨는 1987년부터 매년 5월 27일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제를 지내왔다.
양씨는 지난 12·3 비상계엄 당시에도 1980년의 기억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고 한다. 수도권에 있던 아들이 전화로 “아빠 괜찮냐”고 물었지만 손이 덜덜 떨려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로 이런 일이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또 계엄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시 들릴 수 있나 싶었다.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억압 당하지 않고, 나처럼 끌려가서 고문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서 내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매일 다짐했다. 민주주의는 그냥 온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감옥에 가고, 피를 흘리며 얻어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