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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1)분단의 비극을 피흘림으로 풀어낸 시인 김영

기고 desk@jjan.kr

김영(본명 김웅)시인은 1929년 9월 전북 순창군 순창읍 옥천동에서 아버지 김동혁과 어머니 손순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식자공으로 근무하였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김영이 다섯 살 때까지 순창 해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원을 그만두고 행상할 때는 외가댁에서 외할머니에 의해서 키워졌다.

1937년 순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학년까지 모두 갑(甲)을 맞아 전교 1등을 차지하였고 1943년 순창농림고등학교(현 순창제일고등학교) 졸업 당시 『여섯 해』라는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재학 중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아 그는 고향에서 ‘천재’로 알려졌고, 1949년에는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이무영, 염상섭으로부터 창작법 강의를 듣고 작품활동을 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좌익계 전국문학예술총동맹 순창군지부 서기장을 맡았고, 혁명극과 시낭독 등으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1950년 9월 28일 이후 인민군이 패퇴하자, 잔류한 좌익세력과 그 협력자들이 회문산으로 들어갈 때 시인도 합류하였다. 김영이 입산한 이유는 『남부군』의 작가로 유명한 이태가 빨치산 동료였던 시인 김영(본명 김웅)을 주인공으로 삼은 실명 소설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연세대 재학 중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은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혐의자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탈법적인 처형을 목격하면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시인은 되는 것은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되어야겠다.’

그는 회문산 입산 후, 전북총사령부 제2정치부에서 전단지 원고 작성과 배포를 도맡았다. 토벌군에 밀려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지만,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다가 심한 동상과 열병까지 앓다가 1952년 3월 8일 백무골에서 체포되었다. 1952년 4월 광주수용소를 거쳐, 그해 11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전향 거부로 3년간이나 독방생활을 하는 등 고독의 극한과 폐결핵 중증으로 각혈까지 하면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다. 이 무렵,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무성했던 어머니를 재회했고, 고향 출신 국회의원 임차주와 순창교회 박석은 장로 등이 구명운동을 했다. 1958년에는 오로지 ‘살기 위해서’ 전향서를 쓰고 1960년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이마저 기각되고 말았다. 1962년 재소자 문예 작품 전시회에 그의 시 「벽과 인간」이 당선되어 법무부차관상을 받았다. 1964년 12월 19일 마산교도소에서 가출옥으로 세상에 나왔으며, 1965년 9월에는 신동아 논픽션에 「벽과 인간」이 당선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그의 자전적 소설 『빨치산의 철장 수첩』(1990)을 읽으면서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절감했다. 한 사람의 천재가 시대와 대결하여 무너지고 좌절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벽에 부닥쳐

종소리는 머리와 꼬리를 잘라 먹고

뱀처럼 꿈틀거린다.

 
수건이 마르지 않은 방에서

열병을 앓고 난

신경들이 부딪쳐서 불꽃을 낸다.

 
(중략)

 
벽에 두개골을 곤두박쳐

스스로 출혈을 마시고라도

보랏빛 새벽을 열어야 한다.

「벽과 인간」

 
서른여섯의 노총각 김영은 출옥 후, 열한 살 아래의 고향 처녀와 결혼하였다. 순창고등학교의 영어 강사로 교단에 섰지만, 빨치산 경력이 문제가 되어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10년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물레방아글모임’이라는 문학단체를 이끌었다. 1978년, 겨울에는 서울 영등포 도림동으로 이사하여 고물상과 리어카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88년 11월에는 『창작과 비평』에 「한 줌의 흙」 등 다섯 편의 시를 기고하였고, 첫 시집 『깃발 없이 가자』를 비롯하여 자전수기 『총과 백합』(1988)과 『빨치산 철장 수첩』(1990), 제2시집 『별난 사람 리어카 시인』(1991), 서간집 『두 하늘에 띄운 그림자』(1991) 등을 연달아 출간했다.

시인은 그의 첫 시집 『깃발 없이 가자』의 서문에서 ‘총소리가 요란한 전쟁터에서 피 묻은 수첩에 쓴 시가 대부분이었으며, 출소 후에도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땅을 파면서 비닐하우스 안에서 시를 썼고, 행상을 하면서 섬광처럼 스쳐 가는 시상을 리어카 위에서, 때로는 사과 상자 위에서 썼다.’라고 밝힌 바 있다.

시인은 ‘음지에서 습지로/독버섯 따 먹고 살아온 인생/’이었고, ‘역사여 입을 열어라/ 누가 이들의 꽃봉오리를 짓밟았는가(「음지-태양 없는 땅」 중에서)’라고 올곧게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아이들의 울음에 음악이 흐르고/갓난이의 방실 웃는 얼굴은 / 꽃봉오리보다 아름답다// 내일에 이 집의 주인 /내일 피는 해바라기/(「기저귀」 중에서)’에서 보듯 밝고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며 살았다. 시인은 1995년 10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시인의 시에는 평이성과 현장성이 두드러진다. 시인은 “시란 우리 시대 다수가 읽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듯 그의 시편은 평이한 시어로 우리가 당면한 현장을 잘 그려냈다. 그리하여 민족적 양심에 호소하면서 ‘분단의 벽’에서 벽돌 한 장이라도 헐어내기를 갈망했다. 장교철(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김영의 시 세계는 체험이 직서적으로 드러난 통한의 목소리다. 그러면서 그는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를 개성과 인간의 해방을 근력하고 있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참고 : 장교철 「우리 분단의 슬픈 역사를 피울림으로 통곡하더니」(순창문학 제2호)

김 영 『빨치산 철장수첩』(1991) 외

기고 desk@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