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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 결정적인 20장면]군사 일으킨 이징옥·이시애 ‘역심일까 충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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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조선 세종대왕 시대 압록강·두만강 유역서 여진족 몰아내고 ‘4군 6진' 개척
수양대군 계유 쿠데타에 함길도 이징옥의 난…단종 복권 목적으로 했던 듯
세조의 중앙집권·호패법 강화에 함길도 주민들 불만 커지자 ‘이시애의 난'


1392년 조선 건국 후 압록강, 두만강 유역 북방영토 개척이 진척됐다. 1395년(태조 4년) 여진 건주위 오도리부 족장 몽케테무르(童猛哥帖木兒)가 한양을 방문, 태조 이성계를 배알(拜謁)했다. 17세기 초 후금(後·淸)을 세우는 아이신고로 누르하치는 몽케테무르의 후손이다. 1398년 조선 정권 2인자 정도전은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 자격으로 함길도 일대를 순찰하고 △안변 이북에서 북청 이남까지를 영흥도 △단천 이북에서 경흥 이남까지를 길주도라고 명명(命名)했다. 조선은 두만강변 공주(孔州)에 도호부를 설치해 경원도호부라 하고, 경원도호부를 함길도 경략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조선은 1401년(태종 3년)에 서북면강계만호부를 강계부로 승격시켰다.

1422년(세종 4년)에는 최윤덕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경 군사기지 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동북면(함경도)과 서북면(평안도) 모든 지역을 정식 행정조직에 분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1432년 12월 압록강 남안(南岸), 지금의 자강도 지역에서 쫓겨나 파저강(압록강 지류로 고구려시대 졸본천으로 불렸던 혼강) 유역으로 이주했던 여진 건주위 부족장 이만주가 압록강 중류 여연군을 공격해 왔다. 다음 해 조선 조정은 최윤덕에게 1만5,000여 병력을 주어 이만주 세력의 근거지 파저강 여진족을 공격하게 했다. 조선은 1433년 여연군과 강계부의 중간지점 자작리에 성을 쌓아 자성군을 설치했다. 자성군 설치로 인해 강계와 여연 간 연결선은 확보됐으나, 여진족의 침입은 계속됐다. 조선은 1437년 평안도 절제사 이천으로 하여금 다시 파저강 여진족을 토벌하게 했다. 조선은 여진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1440년 무창현을 신설, 1442년 무창군으로 승격시켰다. 1441년 여연군과 자성군 중간 지점에 우예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등 4군을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하지만 4군과 개마고원의 갑산군 사이 압록강 상류 지역은 방어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여진족의 침공이 계속됐다. 조선은 1441년 무창과 갑산 중간지점에 삼수보를 설치했다. 조선은 삼수보를 삼수군으로 승격시켜 무창-갑산 간 연결선을 확보함으로써 압록강 남안 전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 조선, 압록강·두만강 유역 개척

조선은 두만강 유역에서도 공세적으로 나가 1432년 경원도호부 서쪽, 여진족의 통로였던 석막(石幕)에 새로 영북진을 설치했다. 두만강 유역 개척 의지를 명확히 한 것이다. 1년 뒤인 1433년부터 4군 6진 개척이 본격 시작됐다. 1433년 두만강 유역 와무허 지역(회령) 여진 오도리족이 우디거족의 기습을 받아 족장 몽케테무르 부자가 살해되고, 부락민들은 두만강 너머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만강 유역에 혼란이 발생하자 조선은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에 임명, 본격적으로 6진 개척을 시작했다. 조선은 고려의 북방개척 사례를 참고했다. 세종(재위 1418~1450년)은 고려 윤관, 척준경의 1107년 여진 정벌 시 공험진(헤이룽장성 남단)에 세웠던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쓴 비석을 찾게 했다. 조선은 고려가 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까닭에 북방영토 개척에 실패했던 점을 감안, 압록강과 두만강 포함 자연하천을 방어선으로 삼는다는 정책을 취했다.

조선이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패권국 명나라의 눈치를 봤음은 물론이다. 세종은 명나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궁녀와 환관, 1만 마리의 말을 명나라에 바치기까지 했다. 조선은 1434년 석막에 있던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이동시키고, 부거에 있던 경원부를 공주 근처 회질가(會叱家)로 이동시킨 후 그 자리에 부거현(富居縣)을 설치했다. 또한 요충지 와무허에 새로 진을 설치하고 이를 회령진이라 했으며, 그해 가을 회령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조선은 1435년 영북진에 종성군을 설치했다. 또한 경원부의 옛 치소(治所) 공주를 경원부에서 분리, 공성현을 설치하고 1437년 경흥군으로 개칭했다. 조선은 1440년 종성군 치소가 두만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여진족 침입을 감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치소를 백안수소에서 두만강가 수주로 이동시켰다. 또한 경원과 종성 사이 다온평(多溫平)에 온성군을 설치했으며, 1441년 종성군과 온성군 모두를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443년 경흥군을 경흥도호부로 승격시키고, 회령부터 경흥에 이르는 여진족 방어용 장성을 완공했다. 조선은 1449년 부거현을 폐지하고, 부거 백성들을 석막으로 이주시킨 후 석막의 경원부 터를 치소로 하는 부령도호부를 설치해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으로 이어지는 6진 설치를 마무리했다.

세종의 4군 6진 개척은 한글 창제에 버금가는 민족사의 큰 업적이었다. 다만, 세종 재위기와 이후 당시 동아시아 패권국 명나라가 몽골 오이라트부와 투메트부의 침공으로 수도 베이징이 두 차례나 포위당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명나라의 영향력이 약했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연해주 일대로 지속 북진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애석한 일이다.

# 6진 개척 영웅 이징옥의 반란

이징옥(李澄玉)은 김종서와 함께 6진 개척과 함길도 국경 방어에 큰 공을 세운 용장이다. 이징옥은 고려시대 척준경과 더불어 우리 역사상 2대 무신(武神)으로도 불린다. 이징옥은 1433년 이후 20여 년간 함길도 방어를 담당했다. 하지만 1453년 10월10일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 이유 일파가 자행한 계유 쿠데타는 함길도는 물론 이징옥의 인생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유는 쿠데타 성공 바로 다음 날인 10월11일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경상도 평해로 유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박호문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군사지휘권을 의미하는 병부(兵符)를 넘겨주고, 길주에 있던 도절제사영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이징옥은 한양으로 가던 도중 후견인 김종서가 살해당하고, 이유 일파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길주로 되돌아가 박호문을 살해했다. 그리고 부장 이행검과 함께 도절제사영 병력을 이끌고 종성으로 가 길주와 종성 병사들로 진영을 갖췄다. 이징옥은 함길도 각 병영에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여진족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이징옥은 조심스레 행동했으나, 두만강변 종성에서 종성절제사 정종과 이행검의 기습 공격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때 이징옥이 대금(大金) 황제를 참칭했다고 돼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이유 일파에 의해 심하게 왜곡된 까닭에 사실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이징옥은 반란이 아니라 이유의 조카 단종의 복권을 목적으로 했던 듯하다.

# 이시애의 난

이유는 1455년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으로 등극했다. 이유(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함길도 현지 출신 수령을 조정 파견 관리로 대체하고, 호패법을 강화해 함길도민이 자유롭게 이주하지 못하도록 했다. 함길도민의 불만이 높아갔다. 1467년(세조 13년) 마침내 이시애가 선동한 함길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시애의 조부 이원경은 이오로테무르라고 불리던 몽골제국 고위관리였다. 그는 고려 말인 1370년 오녀산성에서 요동 원정을 나온 이성계에게 항복했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삭방도 첨절제사를 역임했다. 이시애는 경흥진 병마절도사, 판회령부사 등을 지냈다. 1467년 5월 모친상을 당해 고향 길주에 머무르던 이시애는 아우 이시합, 사위 이명효 등과 모의, 단종 폐위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함길도 토호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함길도 도절제사 강효문을 죽이고, 길주를 점령했다. 세조는 조카 이준을 함길·평안·황해·강원 4도 도총사에 임명, 3만여 병력을 주어 함길도로 파견했다. 사령관 이준은 25세로 문과에 급제한 지 1년밖에 안 됐으며, 선전관 남이(南怡) 역시 무과 급제 7년 차에 불과했다. 부사령관 강순은 외척으로 77세였다. 관군은 총통과 화차(전차) 등 신무기로 무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벌전은 처음에는 여의치 않았다. 이시애가 화포로 무장하고, 여진족과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부대 익속군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시애군은 반란 초기 연승, 관군을 철원까지 밀어붙였다. 철원에서 서울까지는 약 100㎞에 불과하다.

다급해진 조정은 증원군을 파견했다. 강순에게 평안도 병력 3,000명을 주어 영흥으로 파견했다. 좌대장 어유소에게는 중앙군 1,000명을 주어 이준을 돕게 했다. 병조참판 박중선이 이끄는 황해도 병력 1,000명도 증파됐다. 함길도 절도사 허종도 참전했다. 증강된 이준 부대는 비로소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강원도) 회양으로 진격했다. 그해 6월 초 관군은 철령을 넘어 계속 진격해 영흥을 점령했다. 이시애는 함흥, 북청을 거쳐 이원까지 퇴각했으며, 관군은 6월20일 고전 끝에 북청에 입성했다. 이시애는 조급해졌다. 사위 이명효로 하여금 홍원, 북청, 삼수, 갑산 백성들로 새 부대를 만들게 하는 등 장기전을 계획했다. 이시애는 남으로 동해를 등지고 북으로는 높은 산을 낀 천혜의 요새 이원 만령(蔓嶺)에서 버티기로 했다. 5만명의 관군이 반군을 포위했다. 처음에는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화약무기를 다루는데 능숙했던 반군이 우세했으나, 화차와 총통을 투입한 관군이 결국 전세를 역전시켰다. 7월31일 어유소 부대가 악전고투 끝에 만령 중봉(中峯)을 점령했다. 8월1일 이시애는 이원에서 단천으로 다시 퇴각했다. 8월8일 관군 부대가 마운령을 넘자 이시애는 단천에서 저항했다. 다시 패배한 이시애는 마천령을 넘어 길주로 도주했다. 이시애는 경성, 회령을 거쳐 두만강 건너 여진족 지역으로 가려 했지만, 처조카 허유례의 속임에 넘어가 포박당하고 관군에게 넘겨져 현장에서 처형됐다.

이시애의 난은 사실상 함길도 독립전쟁이었다. 조선 조정은 함길도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이시애의 난 평정에 성공했다. 세조는 같은 해 9월 명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순과 남이, 어유소 등으로 하여금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군대를 이끌고 바로 서북진,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 여진족을 소탕하게 했다. 조선군은 파저강 유역의 여진 건주부족장 이만주 일가를 모두 살해했다. 이만주는 명나라가 몽골과 싸우는 틈을 노려 요동을 공략하다가 명나라의 미움을 받아 명나라의 사주를 받은 조선군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세조 시대에 현 대한민국 국경의 97%가 확정됐다.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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