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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13> 용진산 호랑이 오성술

21세에 참봉 임명받았으나 을사늑약 체결에 결사항전 다짐
광산군 죽산마을 지방 부호 오영선 외아들로 태어나
용진산 본거지 의병 모집…아버지 도움 군자금 지원
광주·나주·담양·함평·고창 일대서 항일 의병 투쟁
“국치를 못 씻은 것이 한” 1910년 26세 나이로 순국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참봉 오성술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고종 21년) 5월 15일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오영선과 나주 임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죽파로, 22세에 조정에서 충의 참봉을 제수받아 오참봉이라고 불렸다. 오영선은 지방 부호로 집안이 넉넉해 머슴에게도 후한 품삯을 주고, 가난한 이를 돕는 등 선행을 실천했다. 아이를 얻기 위해 임씨 부인은 잉어를 잡아 먹으려했지만, 주변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친정 아버지의 당부를 듣고 그 잉어를 황룡강에 놓아줬다. 그 이후로도 잉어 장수가 올 때마다 잉어를 비싼 값에 사 강물에 풀어줬다. 이렇게 얻은 아들이 오성술로, 백옥 같은 피부에 빛난 눈동자 등 수려한 외모로 유명했다.

어릴 때 그를 업고 다니던 목사리라는 이름의 머슴은 의병 거병 시 성술의 호위 및 운량 책임을 맡았다. 성술은 죽산마을에서 1km 떨어진 웃박매마을(현 광산구 임곡면 박호리)에 사는 후송 양상하를 스승으로 해 공부를 시작했다. 열흘만에 천자문을 외우고 학어집, 사자소학 등을 봄 한 철에 다 익혀 신동으로 불렸다.

 

 

15세에 집안 숙부가 되는 후석 오준선의 문하로 들어갔다. 오준선은 도학과 문장으로 호남에서 장성의 송사 기우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이름 높은 선비였으며, 그가 머무는 용진산의 용진정사는 항상 제자들로 북적였다. 용진산은 기암괴석으로 운치가 있어 찾는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 오성술이 거병한 곳이며, 조경환, 이기손 등 남도의 의병장들 역시 거처로 삼은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성술은 무인다운 호방한 기질로 용진산에 올라가 수련했는데, 99개 골짜기 모두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16세에 금성 나씨 병순의 딸 나형림과 혼인했다.

1905년 7월 만 21세에 여러 선비들의 추천으로 종9품 종사랑 충의참봉에 임명된 그는 11월 18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2월 면암 최익현을 찾아가 결사항전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80세의 연로한 유학자가 20대의 성술에게 “아버지에게 사정을 고하고 동지를 규합해 인재를 모으며 병서를 탐독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성술은 시정잡배들과도 어울리며 사람들을 모으고, 집안 노비문서를 마을에서 가장 먼저 불태워 평등과 자유를 머슴들의 마음에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빈민 구제에도 힘써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것을 내주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1906년 4월 최익현, 임병찬이 태인에서 거병한 뒤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냈는데, 성술도 이를 받았다. 아버지는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지원했고, 성술은 1907년 2월 용진산 영사재에 본거지를 두고 고향인 죽산마을에서 의병 모집에 나섰다. 10일 만에 200여 명이 모여들어 성술은 대장으로 추대됐다. 도총장에 오상열(일명 인섭), 선봉장에 김성현, 중군장에 오원규, 도포장에 김태선, 호군장에 이종석(일명 재춘), 후군장에 양치홍, 좌익장에 오성범, 우익장에 양지술, 군기감에 나만국·오일선, 서기 겸 모사에 오재두, 소모장에 정중회·김경천, 운량장에 김목사리 등이 임명됐다. 의병 수는 계속 늘어 1907년 7월이 되자 500여 명까지 증가했고, 탄환 제조 및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8월 용진산으로 김준이 찾아오고, 9월 기삼연이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하자 그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했다. 성술은 김준과 함께 선봉을 맡아 9월 9일 고창읍성, 9월 23일 고창 문수사 등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11월 25일 고창전투에서 김준의 참모 김익중(장성 출신), 중군장 이남규(함평 출신)가 전사했으며, 의병들은 창평, 감곡까지 후퇴해 부대를 재정비했다. 1908년 1월 1일 광주헌병대가 담양 창평 무동촌을 기습하자 김준, 오성술 등 각처 의병들이 연합전선을 형성, 3면 포위작전으로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3월 7일 영광 토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후 김준의 선봉장 조경환은 불갑산, 김준과 성술은 어등산으로 후퇴했는데, 기삼연은 순창에서 붙잡혀 광주에서 처형됐다. 일본군은 4월 25일 오후 4시 김준과 성술이 있는 어등산을 에워싸고 쳐들어왔는데, 이 때 지병인 요통으로 움직일 수 없는 김준이 성술에게 후일을 부탁하고 일본군을 사격하다 전사했다. 기삼연, 김준의 전사로 남도 의병의 활동은 소강기에 접어들었고, 1908년 7월 진안의 전수용이 용진산에 머물고 있는 오성술, 조경환과 만나 의병 재기 계획을 세웠다.

 

 

성술과 전수용은 합동작전을 펼쳤는데, 성술은 백마를 타고 유격하는 것을 즐겼지만 나귀를 타거나 농민으로 변장하기도 했다. 1908년 7월 27일 광산의 석문산에서 승리했으며, 10월 16일 대명동 전투에서는 일본군 7명을 사살했다. 이어지는 용진산, 석문산, 대명동, 사호치 등에서도 접전 끝에 승리했는데, 성술이 지형을 완전히 파악해 작전을 제대로 짠 것이 주효했다. 9월에는 나주 용문산으로 진을 옮겼는데, 선봉장 김성현의 집과 가깝고 나주와 영산포에 주둔중인 헌병대의 적정을 살피는데 최적지라는 판단에서였다. 성술은 나주 문평면 대명동에서 능선을 타고 용문산으로 가는 도중 대안촌에서 주민들이 내놓은 점심을 먹었다. 마을 집강 이덕중, 신동욱, 정경모, 김찬문 등은 몰래 의병을 지원하는 소위 ‘앉은 의병’들이었다.

1908년 12월 24일 새벽 용진산에 주둔한 성술을 잡기 위해 일본군이 쳐들어왔는데, 두 봉우리 사이 고갯길인 사호치(새우재)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하얀 눈 위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도총장 오상열이 전사하고, 포수 출신으로 총포와 화약 제조에 큰 공이 있었던 도포장 김봉선도 큰 부상을 입었다. 이듬해 1월 31일 밤 25명의 정예병을 편성해 광산군 대촌의 일본인 농장주 모리의 집을 습격, 300여 석의 볏단과 짚을 불태웠다. 2월 4일에는 의병 120명을 이끌고 나주군 신촌면 곡용동(나주읍 흥룡동으로 추정)의 밀정 나귀종의 집을 습격했다. 겨울이 가자 다시 본진을 영사재로 옮긴 성술은 군량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무장 의병 60여 명 등 100여 명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동안 성술은 집안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일부를 노획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좌장군 오성범의 풍숙마을 내 오몽근, 오후근, 오문옥 등 오씨 집안사람들이 쌀 100석을 내놓기도 했다.

 

 

1909년 3월 심수택, 전수용, 이대극,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 오성술 등 독립부대 의병장들은 전략회의를 갖고 의병의 형세가 날로 미약해지는 실정에서 큰 전쟁을 벌이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이에 3월 8일 나주군 남평면 거성동 접전에서 심수택을 지원해 일본군 7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용문산으로 돌아온 성술을 체포하기 위해 일본군이 1909년 7월 20일 밤 11시에 쳐들어오자 성술은 광산군 본량면 동림리로 적을 유인하고, 주위에 매복시켰다. 일본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로 성술의 의병은 30여 명으로 크게 감소했고, 밀정으로부터 성술이 용문산에 숨었다는 정보를 들은 영산포헌병대 요시무라가 8월 병력을 이끌고 용문산을 급습했다. 전의를 상실한 선봉장 김성현은 전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 사라져버렸으며, 성술은 허무하게 생포됐다.

부인 나씨는 일제의 시달림에 광산군 본량면 구룡촌에 들어가 피난살이를 했는데, 성술이 체포되기 3개월 전인 5월 26일 옥동자를 출산했다.

성술은 광주재판소 1차 공판이 열린 1909년 11월 20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는데, 복역 도중 다시 살인과 방화가 추가되면서 1910년 6월 17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도둑놈이 주인더러 도둑이라니 할 말이 없구나. 하늘과 땅에는 의리가 가득하고, 대한제국에는 충신·열사가 가득하다는 것을 너희 일본 정부에 알려주기 바란다.”고 했다.

가족들의 항소로 대구고등재판소로 이감되기 전, 영산포유치장에서 아들을 안은 부인 나씨를 만난 성술은 이름을 팔만이라고 지어줬다. 귀순 권유를 거절한 성술은 대구형무소에서 1910년 7월 16일 원심대로 교수형이 확정됐다. 9월 15일 최후를 맞이한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국치를 못 씻은 것이 한”이라며 2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의병장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였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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