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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불의한 시대…詩로 맞섰던 ‘국토의 시인’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2>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대처승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신춘문예등단…‘식칼론’·‘국토’ 등 펴내
‘시인’지 창간 김지하·양성우 등 양성
곡성 태안사 동리산 자락에 기념관
2000여점 유품 전시·집무실 재현
시집전시관 근대시집 등 3000여권도

 

겨울 산사(山寺)는 적막하다. 찬바람만이 휑하니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터벅터벅, 해찰할 새도 없이 산사로 들어간다. 여느 절이나 입구에서부터 대웅전까지는 오솔길이 나 있다. 여느 때면 찰랑이며 흘러갔을 계곡의 물은 마른 뼈처럼 말라 있다.

겨울의 참맛은 바로 고적함이다. 번잡하고 시끌시끌한 소리로부터 차단된 이 격절감은 한번쯤 마음을 비우고 싶은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것이다. 세상의 처소에 존재하는 한 누구도 소음을 피할 수 없으니, 한번쯤 호젓한 산길을 걸어 산사를 찾을 일이다.
 

누군가는 “이 겨울에 웬 산사를 가느냐”고 물을 것도 같다. 산문(山門)에 들어서려 하시오? 아니면 수도라도 할 참이요? 이도저도 아니면 한 며칠 도를 닦으려는 것이오? 그러나 산행은 앞서의 질문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필자의 산행은 ‘나’보다는 ‘타자’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다. 이 산하에서 죽비와도 같은 외침의 삶을 살다 떠났던 시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곡성 태안사(泰安寺). ‘국토의 시인’ 죽형(竹兄) 조태일(1941∼1999)을 품은 곳이다. 알려진 대로 조태일의 부친은 대처승이자 이곳의 주지였다. 시인이 이곳 동리산 자락 태안사에서 유년의 한때를 보낸 건 당연했다. 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생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고 원색적으로 각인되는 시기’에 스님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승복으로 상징되는 강렬한 잿빛만이 그의 기억을 채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시사철 푸른 산하의 절경은 그의 뇌리에 영감의 불을 지폈다. 거침없는 산세와 오색 단풍이 융합된 그의 문학이 뜨거우면서도 아름답고, 활달하면서도 정제된 느낌을 환기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대처승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조태일은 광주서중, 광주고, 경희대를 졸업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식칼론’, ‘국토’,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등을 펴냈다. 1969년 ‘시인’지를 창간해서는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박남준 시인 등을 발굴했다. 1989년부터 광주대에서 후학을 양성했지만 그러나 1999년 9월7일 간암으로 작고했다.

 

 

시인의 탯자리, 태안사는 동리산 자락에 위치한 풍광이 뛰어난 절이다. 일설에는 봉황이 먹고 산다는 오동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동리산에 자리한 곳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원년 (742년)에 신승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문성왕(847) 때 혜철국사(惠哲·785~861)에 의해 선종사찰로 개산돼 구산선문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서는 동리산파의 중심 도량이 될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태안사 아래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아니 10여 분 거리에 조태일시문학관이 있다. 노루꼬리처럼 짧아진 겨울볕을 받아 문학관 위로 산그림자가 들이친다. 지난 2003년 개관한 문학관은 골짜기에 면한 옴팡진 곳에 들어서 있다. 일직선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건물은 생전 시인의 성정만큼이나 조금의 에두름이나 빈틈이 없다.

“오래 전 이곳은 태안사 스님들의 다비식을 하는 곳이었답니다. 스님들이 입적하시면 이곳에서 화장을 했다고 하네요. 처음 문학관을 건립한다고 했을 때, 태안사가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조태일 시인의 아버지가 태안사 주지였었다는 예전의 인연이 작용한 거겠지요.”

 

 

문학관 관리를 담당하는 곡성군 공무원 이해영 씨의 말이다. 그는 “죽형 선생이 학교 선배가 된다”며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죽곡 초등학교 동계 분교를 조태일 시인이 다녔고 후배인 자신도 그 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얼추 20년 차이 나는 선후배 사이지만 “학교 다닐 때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마음으로 존경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태안사가 시인의 원초적인 고향이라면, 문학관은 그의 삶이 집결된 ‘인생의 집’일 거였다. 이 두 공간이 물리적으로 변별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동리산’이라는 장소로 수렴된다. 언젠가 조태일은 이런 말을 했었다.

“나의 시는 내가 태어난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의 동리산 품에 안긴 태안사에서 출발한다. 그곳에서 겪은 체험은 원초적 생명력을 형성하여 내 시의 골격을 이룬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리산 태안사 탯자리가 조태일 시의 원형이 된 것은 그 때문일 거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후략)”

그의 시 ‘국토’를 읽으면 비장감 같은 게 느껴진다.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선언적인 행위와 의미가 겹쳐진다. 한편으로 그의 ‘죽형’(竹兄)이라는 호가 선연히 떠오른다. 대나무처럼 푸른 의기, 변치 않는 지조는 분명 그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또한 그의 호 ‘죽형’은 이곳이 죽곡면에 속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한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대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하여 이곳의 지형과 조태일의 문학적 세계, 인간적인 품을 어우르는 말로 ‘죽형’은 안성맞춤의 언어다.

문학관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딴 세상이 펼쳐진다. 밝고 환한 기운이 높다란 창틈으로 쏟아지듯 들이친다. 산 아래 모든 볕은 이곳으로 투영되는 것 같다. 전면에 조태일의 얼굴을 글자 음영으로 형상화한 포스터가 보인다. “자네 왔는가”라고 반갑게 맞아줄 것도 같은 분위기다.

이곳에는 시인의 출생과 성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깃든 2000여 점의 유품과 활동과정이 연출돼 있다.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집무실도 재현해 놓아 그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했다. 또한 우리나라 시 문단사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시인들의 연대표와 활동상도 전시돼 있다.

기념관과 이웃한 별도의 공간에는 시집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해방 이후 발간된 최남선의 ‘백팔번뇌’,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등 희귀본을 비롯해 근대시집 3000여 권이 있다.

그렇게 죽형은 우리들 곁에 여전히 살아 있다. ‘국토의 숨결이 열리도록’ 뜨거운 노래를 불렀던 그가 그립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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