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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통영 청마문학관

<5> 청마의 시를 잉태한, 그 푸른 통영의 바다
시인 유치환 문학정신 보존·계승
유품 1000여점·문헌 350여점 전시
한국시인협 초대 회장…교육자로 활동
‘청마시집’‘파도야 어쩌란…’ 등 펴내
여류시인 이영도와 문학적 인연도

 

깃 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는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시퍼런 바다는 청옥빛이다. 눈이 부시다. 그에 반해 하늘은 청색보다는 덜 파란 연옥빛이다. 하늘과 바다가 이렇게 서늘한 빛깔이라니. 저 바다는 그렇게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유치진, 전혁림을 낳았다. 남해안 어느 곳을 가더라도 그 빛깔이 곱지만 유독 통영의 빛깔이 인상적이다. 동으로는 거제, 서로는 남해를 끼고 있다. 좌청룡 우백호처럼 한려수도의 진경을 거느린 지역이 이웃한다.
 

통영(統營)은 한려수도이기 전에 역사적인 도시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돼 통영시가 됐다. ‘통영’은 3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을 줄여 부르던 이름인 통제영에서 유래됐다. 조선은 임란 이후 수군을 지휘하기 위해 1593년(선조 26)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어디선가 바닷바람이 불어와 온몸을 적신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일까. 소랑소랑, 아니 우렁우렁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다에 접한 곳에 오면 늘 푸른 소리가 비처럼 쏟아진다.
 

이제야 알겠다. 그것은 바다를 가르며 내달리는 작은 어선에서 나부끼는 깃발의 소리다. 바람을 응시하는 깃발의 직립! 이 순간 청마 유치환의 시가 절로 떠오른다.

아마도 시인 유치환(1908~1967)은 눈으로는 바다를, 마음의 눈으로는 영원한 무엇을 바라보았을 게다.

 

 

청마문학관은 유치환의 문학정신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00년 2월에 문을 열었다. 망일봉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곳이라 먼 바다를 굽어볼 수 있다. 아마도 망일봉이라는 이름은 해를 바라보는 언덕배기라는 이름일 터다.

문학관에는 청마의 유품 1000여 점과 문헌자료 35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시인의 생애와 문학세계가 집약된 이곳은 크게 ‘청마의 생애’와 ‘청마의 작품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유치환은 1908년 7월 14일 통영에서 한의원인 유준수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하던 해는 한일합방이 목적에 닥친 어수선한 시기로 국운이 쇠하던 때였다. 나라의 수난기라는 절체절명의 분위기가 그의 문학 인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청마의 형은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동랑(東朗) 유치진이다. 청마보다 세 살 위인 동랑도 연출가 겸 극작가로 활동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청마의 흉상과 마주하게 된다. 안경을 쓴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인상이 예상했던 시인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얼핏 지사적인 느낌도 없지 않지만 먼 곳을 향하는 듯한 눈빛에서 문인의 감성이 읽힌다.

부친이 한의원을 운영했던 덕에 청마는 비교적 유복한 삶을 살았다. 통영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도요야마 중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으로 등단했으며 1939년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이후 ‘생명의 서’, ‘청마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 주옥 같은 작품집을 펴냈다.

청마는 스물한 살 때 통영 출신 권재순과 결혼했다. 청마보다 한 살 아래였던 권재순은 결혼 당시 유치원 교사였다. 부인은 청마가 독재 권력에 맞서다 실직을 하는 동안에도 집안을 꾸려나갔다.

청마는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이주해 잠시 정착하기도 했다.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만주로의 이주는 일제 강점에 대한 불후한 현실에 대한 항거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한 6·25 때는 종군 기자로 휴머니즘이 담긴 글과 시를 썼다. 귀국 이후에는 주로 교육계에 몸담으며 시작을 병행했다. 부산여상 교장, 경북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거쳐, 예술원 초대 회원으로 활동했다.

문학관 뒤로는 생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생가를 재현한 곳이다. 오르는 길에 동백꽃이 피어 있어 눈길이 간다. 시린 바닷바람에도 붉음을 잃지 않는 꽃잎은 종종 사랑의 의미로도 치환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파도’ 중에서)

청마와 여류 시인 정운(丁芸) 이영도와의 로맨스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청도 출신인 이영도는 한국를 대표하는 여류 시조시인이었다. ‘파도’라는 시에는 청마의 이영도에 대한 연정이 담겨 있다. 당시 이영도는 미망인이었고 유치환은 가정이 있었다.

유치환과 이영도의 만남은, 청마가 통영여중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이영도는 가사교사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당시 이영도에게는 사별을 하고 딸 하나가 있었다. 유치환과 이영도는 아마 문학을 매개로 동료의 정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유치환은 1967년 60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는 수천 통이었다고 한다. 이영도는 1967년 그 중에서 편지를 골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엮었다. 또한 시인은 인세를 정운시조상(丁芸時調賞) 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이들의 플라토닉 러브는 서로의 문학적 지평을 넓혀주었을 거다. 유치환의 시가 생명의식과 허무의지를 뛰어넘어 영원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확대된 데는 그러한 연정도 기폭제가 됐을 거라는 얘기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