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강릉 15.6℃
  • 맑음서울 17.4℃
  • 맑음인천 15.0℃
  • 맑음원주 17.8℃
  • 맑음수원 17.0℃
  • 맑음청주 18.7℃
  • 맑음대전 16.6℃
  • 맑음포항 14.3℃
  • 맑음대구 20.3℃
  • 맑음전주 17.0℃
  • 맑음울산 18.7℃
  • 맑음창원 20.6℃
  • 맑음광주 17.5℃
  • 맑음부산 20.7℃
  • 맑음순천 17.1℃
  • 맑음홍성(예) 16.1℃
  • 맑음제주 20.1℃
  • 맑음김해시 20.3℃
  • 맑음구미 18.5℃
기상청 제공
메뉴

(광주일보)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이병주 문학관

<6> 지리산이 품고 기른 작가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하동서 태어나 44세 늦깎이 데뷔
1955년 국제신보 편집국장 역임
필화 사건으로 2년 7개월 복역
‘지리산’ ‘산하’ 등 80여 작품 남겨
2008년 개관 전시실·창작실 갖춰
매년 학생백일장·강연회 등 행사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이병주, ‘삐에로와 국화’에서)

코로나로 사방이 막혔다. 그럼에도 봄은 고운님처럼 우리들 곁에 와 있다. 조심조심 봄을 맞으러 남향을 한다. 가느다란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남으로 내달렸다. 첩첩이 이어진 산줄기와 올망졸망한 산세는 정겨운 남도의 이미지를 닮았다.
 
섬진강을 지나고 전라도의 끝자락을 지나 하동으로 들어선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지리산 줄기는 변함없이 넉넉한 품으로 길손을 맞는다. 언제 와도 하동은 시정(詩情)이 넘치는 고장이다. 가만히 읊조리면 눈앞에 넓은 벌이 펼쳐지고 넉넉한 인심을 품은 강줄기가 떠오른다. 하동은 섬진강의 동쪽을 아우를 뿐 아니라 비옥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한다사군(韓多沙郡)으로 불렸고 경덕왕 때 이르러 하동(河東)이 되었다 하니, 지명에 담긴 풍경과 그 뜻은 다함없이 깊다.

3월에 지리산과 섬진강의 고장 하동을 찾은 건 그만한 연유가 있다. 16일은 소설가 이병주(1921~1992)가 태어난 날이다. 이병주는 지리산 인근 하동에서 태어난, 지리산이 품고 기른 작가다. 작품의 자장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확대 수렴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지리산 아우라가 깊이 침윤돼 있다. 1972년 이병주는 장편소설 ‘지리산’ 연재를 시작하며 이렇게 각오를 다졌다.

“나는 지리산을 실패할 작정을 전제로 쓴다. 민족의 거창한 좌절을 실패 없이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내게는 없다. 좌절의 기록이 좌절할 수 있을 수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최선을 다해 나의 문학적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다.”

이병주 삶의 팔 할은 지리산의 자장으로 형성됐는지 모른다. 나림(那林) 이병주. “어떤 숲” 또는 “큰 숲”이라는 뜻의 ‘나림’은 질곡의 근현대사의 이면을 파헤쳐온 작가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상징한다.

하동에서 태어난 이병주는 후일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를 졸업했다. 1955년부터 국제신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필화 사건으로 2년 7개월을 복역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이후 1965년 마흔 넷에 ‘세대’ 7월호에 ‘소설 안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며 늦깎이로 데뷔한다. 이병주 문학의 원형이라 평가받는 이 소설은 필화사건으로 겪은 옥살이의 부당성을 고발함과 아울러 인간과 역사, 전쟁과 이데올로기 등을 특유의 날카로운 시각으로 그려냈다.

이어 일제 말 지식인들의 생존의 모습과 내면을 파헤친 ‘관부연락선’,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과 공산당의 잔학상을 서사화한 ‘지리산’, 해방공간부터 자유당, 4·19에 이르는 현대사를 조명한 ‘산하’ 등 8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특이한 것은 등단 후 생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27년 동안 한달 평균 1000여 매의 원고를 써내는 초인적인 글쓰기를 지속했다는 점이다. 원고지로 치면 대략 10만 장의 분량을 그는 혼신을 다해 메웠다. 그를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고 평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 소설 ‘지리산’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근대의 격동기를 관통한다. 일제말부터 8·15해방, 6·26전쟁 그리고 휴전협정까지를 다룬 소설은 식민지와 해방 그리고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모순과 비극을 핍진하게 그렸다. 역사의 렌즈로는 웅숭깊은 삶의 면모를 다 들여다볼 수 없는 진실을 그는 특유의 예리한 문체로 생생하게 담아냈다.

하동 지리산 인근 언저리에 자리한 이병주문학관. 지난 2008년 개관한 이곳은 전시실과 강당, 창작실을 갖추고 있으며 작가의 생애와 문학적 결실이 실답게 구현돼 있다.

하동 읍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학관 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게 솟은 펜촉 조형물이 서 있다. 왼쪽, 오른쪽 나란히 선 두 개의 펜촉은 마치 이곳의 출입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수문장 같다. 글을 쓰는 이들뿐 아니라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로 보인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이번에는 거대한 만년필 조형물이 이편을 맞는다. 천정에서부터 종이를 뚫고 내려온 만년필은 작가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 같다. 바깥의 펜촉과 내부의 만년필 조형물은 모두 순교할 각오로 집필을 이어왔던 작가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문학관 내부는 원형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연대기 순서로 작가의 생애, 작품 그리고 문학 세계가 구현돼 있다. 이병주가 활동했던 당시 70년대의 문학청년들 사이에서는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이 회자됐다.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자 국제신보에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논설을 썼다. 그로인해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한다.

문학관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매년 ‘이병주 문학강연회’, ‘이병주 하동국제문학제’가 열린다. 이밖에 전국학생백일장 및 논술대회, 어린이 문학캠프도 개최해 체험의 장을 선사한다.

작가는 생전에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작가이기 전에 기록자라는 사명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의 발자크’인 이병주의 문학정신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은, 작가는 창작자이기 전에 기록자라는 명제를 일깨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