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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조선 유희춘 ‘미암일기’보관했던 수장시설

지난해 등록문화재 된 담양 모현관 가보니
유물 보호 위해 후손들이 주도해 건립
모현관 편액 허백련 글씨로 유명
미암일기는 현재 미암박물관에 보관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묵향의 느낌이 난다. 고적하면서도 한가롭다. 담양 창평읍내를 지나 멀찍이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면 저편에 장산마을이 보인다. 야트막한 산자락이 마을을 에워싸고, 앞으로는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들이 펼쳐져 있다.

목적지인 장산마을은 창평 슬로시티 삼지내마을과 멀지 않다. 머릿속에 슬로시티 잔상이 남아 있는 터라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이채롭다. 문명과는 조금 거리를 둔, 그렇다고 완벽하게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 그런 분위기가 난다.
 

모현관(慕賢館·등록문화재 제769호) 앞에 당도하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지금까지 와보지 못했던 터라 이곳은 머릿속 상상으로만 존재했다. 상상보다, 기대보다 더 미려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물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건물.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커다랗게 실사한 예술 사진이 세워져 있는 것 같다.

모현관은 지난해 연말 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이곳은 조선 중기 문신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 등 관련 고서적을 보관하던 수장시설이었다. 지난 1957년 후손들이 주도해 건립했으며 한국 전쟁 이후 혼란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물 보호를 위해 건립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회적 가치가 높다.

모현관 남쪽으로 수령 600년이 된 느티나무들이 서 있다. 마치 오랜 세월 성문을 지키는 늙은 수문장 같다. 허투루 들어서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난다. 모현관이 자리한 연못은 노루골이라 불렸던 곳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모현관은 건물에 담긴 의미뿐 아니라 주변 풍광이 선사하는 정취도 만만치 않다. 봄날 가녀린 푸른 빛이 감도는 이맘때의 풍경도 그렇지만 산등성이에 소복이 눈이 쌓인 겨울, 오색의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도 이곳은 한폭의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석조 조적식 구조로 이뤄진 건물은 외벽에 푸른 돌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비슷한 시기 건물로 1955년 지어진 전남대 구 법대 본부와 구 공대본부 등이 있는데, 이곳에 청석이 쓰였다는 보고가 있다.

모현관은 지난 1957년 유적보존회가 설립되면서 건립이 가시화됐다.

당시 참여한 사람의 일면을 보면 미암일기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전남도지사, 광주시장, 광주고등법원장, 전남대총장, 서울대총장, 광주시의회의장, 목포시장 등 각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당시 발기문에 ‘국보 미암일지’라고 표현된 것만 봐도 이곳에 투영된 문화적 심미안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유희춘의 ‘미암일기’는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이 많다 보니 임진왜란 이후 선조실록을 복원하기 위해 미암일기가 참고자료로 쓰였다 한다. 현재 ‘미암일기’는 11권이 전해온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55세인 1567년 10월부터 1577년 10월까지 쓴 기록이다. 세상을 뜨기 2일 전까지 일기를 썼다 하니 그의 기록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일기에는 일상생활은 물론 당시 국정에 대한 견해, 공사(公私)에 대한 사실 등이 기록돼 있다.

특히 미암일기에는 유희춘이 그의 부인 송덕봉과 나눈 이야기가 전해온다. 송덕봉(1521~1578)은 당시 유교적 규범과는 다른 자기 주장이 강한 당당한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가부장적 시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글로 썼던 여인이다. 본명은 송동개였지만, 드물게 ‘덕봉’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여성 문인으로 손색이 없는 문장을 겸비했다는 평이다.

안타깝게도 덕봉의 문집 ‘덕봉집’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덕봉에 대한 기록은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보물 제260호)에 실려 있을 뿐이다.

모현관의 편액은 허백련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허백년의 글씨임을 알 수 있는 ‘백년’이라는 글씨가 현판 밑에 있다.

현재 미암일기를 비롯한 유물은 인근 미암박물관에서 관리한다. 미암박물관은 지난 2015년 모현관에 있던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 건립됐다.

미암박물관 관계자는 “현재 미암일기는 보존처리를 위해 서울 관련 기관에 보내졌다. 4월 이후에나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올 것 같다”고 밝혔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