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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사천 박재삼 문학관

사천의 바다가 키운 전통적 서정과 詩心
가난한 시인의 ‘문학적 고향’
호연재 옆에 2008년 개관
단출하면서도 정갈한 작품들
순수서정성을 현대적으로 변용

 

“나는 시를 쓸 때도 어렵게 쓰는 이른바 난해시를 피한다. 어떻게 하면 내 시에 독자가 가까이 다가올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느냐에 신경을 쓴다.”

생전에 박재삼(1933~1997) 시인이 했던 말이다. 그의 시는 쉽다. 그리고 슬프다. 쉬우면서 서정적인 시는 오늘날 수사와 기법, 현학으로 버무려진 시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불가해한 시를 쓰는 것이 마치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는 것처럼 돼버린 시대에, 간결하면서 단정한 시들은 역설적으로 귀하게 다가온다.

 

 

박재삼은 평생 가난과 슬픔을 지고 살았다. 고전적 의미의 시인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문인이다. 우리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인들은 대부분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유정, 채만식, 이상 등이 그렇다. 물론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에 매진하다 보니 재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있었다.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등 극소수의 문인들이 이 경우인데, 그러나 이들마저도 물질적 부유함보다는 문학을 위한 삶에 매진했다.

언급한 대로 박재삼 시인 또한 평생 가난과 질병을 안고 살았다. 생래적으로 정적인데다 외로운 기질을 타고났다. 1933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어머니의 고향 삼천포로 이주한다. 사천(삼천포)은 시인의 고향이 아니라 유년과 이후의 삶의 여정을 결정한 ‘문학적 고향’이다. 삼천포고를 졸업하던 해 ‘文藝’에 시 ‘江물에서’로 모윤숙의 추천을 받았다. 1955년에는 ‘현대문학’에 시조 ‘섭리’, 시 ‘정적’으로 추천을 받는다.
 

이후 ‘현대문학’에 입사해 잠시 근무를 하다 뒤늦게 고려대 국문과에 입학해 만학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3학년 때 중퇴를 하고 이후에는 창작활동에만 매진한다.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 ‘천년의 바람’, ‘다시 그리움으로’ 등과 수필집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 ‘빛과 소리의 풀밭’등이 있으며 문교부 문예상, 노산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은관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박재삼문학관은 경남 사천시에 자리한다. 지난 95년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돼 사천시가 됐다. 상식적으로 세가 큰 삼천포시로 통합되는 게 맞지만 사천시로 개칭된 것은 저간의 사정이 있다.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부정적인 말 때문에 ‘삼천포’라는 지명을 회피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사천은 사통발달 교통의 도시다. 하늘길을 연결하는 사천공항과 한려수도를 이루는 청정의 바다가 있으며,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남해고속도로가 있다. 좌로는 하동, 우로는 고성과 통영이, 위로는 진주가, 아래로는 남해가 자리한다.

사천이라는 도시를 잘 모르는 이들도 학창 시절 역사시간에 한번쯤 들었을 법하다.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출격해 승리한 전투가 바로 ‘사천해전’이다. 서남해안의 바다가 이순신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충무공의 발자취가 싯들어 있는데 이곳 사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역사적인 땅, 사천에 들어서자 충무공의 뛰어난 지략과 애국의 얼이 새삼 느껴진다. 사천은 초행길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 그러나 팔도 어디를 가도 내 나라 내 땅이라는 생각을 하면 반갑고 정겹기 그지없다.

 

 

박재삼문학관은 그의 시 만큼이나 단출하면서도 정갈하다. 문학관도 시인의 작품을 닮나 보다. 화려하지 않고 검박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인자한 그의 모습과 마주한다. 평생 문학을 업으로 생활의 불편을 묵묵히 감내했을 그의 삶이 가없이 다가온다.

지난 2008년 개관한 이곳에는 전시실, 문예창작실, 영상홍보실, 자료실, 어린이 도서관, 서재 등이 있다. 다소 비좁다고 느낄 정도이지만 꼭 필요한 자료들만 비치돼 있다. 특이한 점은 문학관이 자리한 옆에 호연재(浩然齋)라는 서당이 있다. 조선 영조46년(1770)에 세워진 대표적인 서당으로 지역 인재들이 학문을 연마했다. 구한말에는 호연재 문객들이 나라 잃은 아픔과 분노를 문집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이후 1901년 보흥의숙으로, 1905년에는 광명의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의 삼천포초등학교가 호연재를 바탕으로 출발했다고 하니, 문학관이 바로 옆에 들어선 것은 우연은 아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江을 보것네….”

박재삼의 대표작 ‘울음이 타는 가을 江’에는 삶의 통과의례가 담겨 있다. 죽음과 제사 그리고 ‘가을강’은 삶의 허무가 깃든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러나 가을강이 상징하는 것은 죽음과 소멸만이 아니다. 다시금 재생하는, 그 너머의 삶을 희구한다.

“박재삼은 1920년대의 김소월, 1930년대의 김영랑으로부터 1940년대의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의 청록파로 이어져 내려 온 순수서정시의 정통을 이어받은 195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라 평가된다.”

최동호 평론가는 제4회 박재삼 세미나 발표 원고에서 그렇게 평했다. ‘순수서정성을 현대적으로 변용시켜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라고.

소담하고 아늑한 문학관 내부를 둘러보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사천의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바다는 아니지만,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면서도 정답다. 흐린 탓에 푸른 수면으로 쏟아지는 하늘빛은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시인이 바라보며 시심을 키웠을 저 바다. 박재삼은 이곳에서 바다 너머 너머를 바라보며 시원의 바다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바다는 유년의 박재삼에게 시라는 상상과 신화의 세계를 선물했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 침잠해 있었을 사천의 바다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그 바다인가 싶어 가슴 한켠이 싸해진다.

/글·사진=박성천기자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