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학번 신입생은 낭만 어린 대학 생활을 꿈꿨다. 고등학생 시절, 머리로만 그리던 미팅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여학생과 캠퍼스를 거니는 상상이 그것. 상상만으로도 가슴은 두근거렸다. 새로 알게 된 과 친구들과 밤새워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로 시작하는 고래사냥을 목청이 쉬도록 불러 젖혔다.
하지만 이러한 캠퍼스의 낭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방아쇠
강원대 등 전국 각지 거리시위
최루탄·화염병 전쟁터된 캠퍼스
대통령 직선제 민주화 이뤄내
86학번 신입생은 낭만 어린 대학 생활을 꿈꿨다. 고등학생 시절, 머리로만 그리던 미팅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여학생과 캠퍼스를 거니는 상상이 그것. 상상만으로도 가슴은 두근거렸다. 새로 알게 된 과 친구들과 밤새워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로 시작하는 고래사냥을 목청이 쉬도록 불러 젖혔다.
하지만 이러한 캠퍼스의 낭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꿈 많은 20대 청춘들을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으로 만든 건 '광주 비디오'였다. 여러 번 복사를 해서 영상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진압군의 총칼과 군홧발 그리고 몽둥이에 짓밟힌 광주시민들의 죽음은 많은 20대의 삶을 바꿔 놓았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1980년 5월의 광주 실상은 갓 입학한 청년들에게는 충격이었다.
학생들은 계엄군이 휘두른 총칼 앞에 힘없이 쓰러져 간 무고한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목도하고 스스로 운동권이 됐다.
1987년에 이르러 분노는 폭발한다. 그해 1월,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 사건이 방아쇠 역할을 했다. 전국 곳곳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춘천에서도 죽림동 성당에서 신부 등 50여명이 미사 후에 성명서를 낭독하고 가두행진을 감행했으며 이 중 20여명이 연행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가 이어졌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까지 발표되면서 대학가는 호헌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여기에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피격되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시위는 더 격화된다.
정의롭지 못한 국가권력은 진실을 알리는 입을 틀어막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다. 정권은 20대 청춘들을 시위대와 전투 경찰로 갈라 놓았다. 이해인 수녀가 노래한 '6월의 장미'와 같은 청춘들. 그리고 그들의 시간은 거대한 권력에 의해 압류당한 채 덧없이 흘러갔다. 1987년 6월 항쟁은 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불의에 저항하던 스무 살 맨손의 청춘들은 부정의(不正義)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지고 꽃병(화염병)을 날렸다.
사진 ①은 1987년 강원대 후문에서 시국집회를 마친 춘천지역 대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도로에 나선 모습이다. 도로를 막은 전투 경찰들을 향해 화염병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사진 ②는 시위를 막는 전투 경찰들이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을 온몸으로 막고 있다. 당시 정권은 시위를 막기 위해 전투 경찰을 선발, 전국의 시위 현장에 투입시켜 국민의 주장을 억누르기에 급급했다.
대학 캠퍼스는 전쟁터로 변했다. 전투 경찰에, 백골단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로 보도블록은 온통 뜯겨져 나갔고 주변 가게는 문을 닫기 일쑤였다.
매캐한 최루탄의 흔적들은 마치 대학의 냄새인 양 안개처럼 곳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스크럼을 짠 학생들은 교가처럼 '민중가요'를 불렀다.
울분에 겨워 목이 터져라 부르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청춘들을 위로하는 노래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결국 이들의 저항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이끌어낸다. 많은 이는 이를 '6·29 항복'이라고 불렀다.
김남덕·오석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