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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문화도시 광주, 이제 문학관이다 <5> 충북 보은 오장환문학관

1930년대 깊이와 세련, 생명과 낭만을 추구했던 천재시인
서정주·이용악과 ‘시단 3대 천재’
고교시절 정지용으로부터 사사 받아
16세에 ‘조선문학’에 ‘목욕간’ 발표
소담한 문학관 맞은편에 생가
시인의 창작 숨결 느껴져
전국 문인들 축제 ‘오장환 문학제’

 

1930년대는 한국 시문단사에서 풍성한 결실의 시기였다. 정지용,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으로 대변되는 시문학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순수 서정의 추구를 통해 언어에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 또한 30대에는 이성과 이지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계열의 유파가 나타났다. 김기림, 김광균, 이상 등은 회화적이면서도 이미지적인 시를 추구했다.

뒤이어 생의 본질을 탐색했던 일군의 시인들이 등장했다. 서정주, 오장환, 유치환 등이 그들이다. ‘생명파’라 불리는 이들은, 생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시적 성취를 일궜다.
 

특히 오장환은 작품의 스펙트럼과 성취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대 모더니즘의 기수였던 김기림은 오장환 시에 대해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생에 대한 탐구만으로 한정할 수 없는 깊이와 세련, 낭만이 혼재돼 있다는 의미다.

오장환은 1930년대 한국 시문학사에서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대 천재’로 평가받는다. ‘천재는 단명한다’는 속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그는 만 33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재(詩才)를 펼쳐 보이기도 전에 오장환은 그렇게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만다.

 

 

충북 보은은 오장환(1918~1951) 시인의 고향이다. 남도에서 충복 보은까지는 적잖이 먼 거리다. 한달음에 내처 갈 거리가 아니다. 문학의 그윽한 향기를 찾아 떠나는 길은, 사실은 약간의 만용이 추동되는 여정이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길을 떠나는 여정과 맞물려 있지 않던가. 떠나야 만나는 것이고, 만나야 보게 되고, 봐야 알게 되는 이치다.
 

남도의 여름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익숙한 것과 익숙지 않은 것은 늘 그렇게 인식의 길항을 강제한다. 낯선 곳으로의 이동은 생각의 자유를 열어주고 시야의 반경을 넓혀준다.

 

 

 

오장환은 휘문고 재학중에 문예활동을 하며 교지 ‘휘문’에 ‘아침’과 ‘화염’을 발표했다.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 발표를 계기로 문단에 나온다. 당시 그의 나이 16세였다. 이후 20대 초반 ‘성벽’, ‘헌사’라는 시집을 발간해 당대 촉망받는 시인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오장환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다. ‘월북 작가’라는 불온의 딱지 때문이었다. 80년대 후반 월북작가 해금을 계기로 그의 문학과 생애가 알려진다. 한 때 그의 시집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이들도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회인’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면 소재지는 오래된 소읍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퇴락의 이미지보다는 여백의 미가 깃들어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여느 한적한 시골과 다를 바 없지만, 일반의 풍경과는 결이 다른 아우라가 배어 있다. 시인의 고장이라는 선입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심한 듯 고적한 운치가 잔향처럼 어른거린다.

문학관은 아담하고 소박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건물로 압도하지 않고 화려한 배경으로 위용을 자랑하지 않는다. 문학관이라는 안내 표지가 없다면 스쳐 지났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외양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느냐가 건물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실내로 들어서면 소담한 전시관이 나온다. 비운의 역사 속에서도 어머니와 고향 그리고 조국을 떠올리며 창작을 했던 시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나의 길-해설이 있는 시집’, ‘오장환 시집’, ‘오장환 문학의 재발견’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시인의 천품만큼이나 단출하면서도 정갈하다.

지난 2006년 개관한 이곳은 월북시인 문학관으로는 처음 문을 열었다. 맞은편에 시인의 생가가 복원돼 있어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푸른 잔디가 깔린 앞마당은 때마침 장마철 내린 비로 생기가 넘친다.

 

 

 

오장환은 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 경기도 안성으로 전학을 간다. 중동학교를 수료하고 이후 휘문고에 입학해 본격적인 문학의 길을 걷는다. 얼마 후 동경유학을 위해 휘문고를 그만두고 20세 되던 해 일본 명치대학 문예과에 입학한다. 일본 유학을 떠났던 그가 귀국한 것은 부친의 악화된 병세 때문으로 보인다.

평자들은 오장환의 넓은 시적 스펙트럼을 노마드적 기질에서 찾는다.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로 진학했으며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6·25전쟁을 전후해서는 평양,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고단한 여정을 떠나야 했다. 당시 서울, 동경, 평양, 모스크바가 상징하는 공간은 극적이고 불온했다. 시인의 내면에 잠재된 끊임없는 이상에의 추구, 이를 결행하는 과단성은 시의 지평을 넓혔을 것이다.

오장환의 문학을 말할 때, 그와 문학적 교유를 했던 이들을 빼놓을 수 없다. 휘문고 시절 정지용으로부터 사사를 받았고 서정주, 김광균 시인등과도 시적 교류를 이어왔다.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박인환 시인으로부터는 문학적 흠모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곳 문학관의 사무를 담당하고 있는 문화해설사임선빈 씨는 “당시 북쪽은 이용악, 남쪽은 오장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오장환은 대단한 시인이었다”며 “문학적 자장이나 영향 등을 고려할 때 그가 오랫동안 시작활동을 했다면 한국 시문학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보은에서는 가을이면 오장환문학제가 열린다. 전국의 문인들과 문학동호인, 문학청년, 학생들이 찾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전국 축제로 자리잡았다. 시낭송, 백일장, 시그림그리기대회, 작은음악회, 시노래 합창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학술세미나와 오장환 문학상 및 신인문학상 시상식도 개최해 오장환의 문학을 심도 있게 연구, 창작, 계승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한다. 보은 회인이라는 한미한 지역이 오장환을 브랜드로 내세운 이유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