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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안동을 걷다, 먹다] 6. 비밀의 숲 '낙강물길공원'

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6. 비밀의 숲(시크릿 가든 혹은 낙강물길공원)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몽환(夢幻)적인 '수련' 연작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다.

 

"마법처럼 내 연못이 깨어났다. 난 홀린 듯 팔레트와 붓을 잡았고 다시는 그보다 더 멋진 모델을 만날 수 없었다"

 

문득 2007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빛의 화가-모네' 전시회에서 본 8점의 '수련' 연작이 떠올랐다. 프랑스 파리의 마르모땅(Marmottan)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수련 연작의 서울나들이였다. 미술사에서 '인상주의'의 성서로 불리는 모네의 대표작인 '수련'.

 

그 수련의 모델이 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안동에서 만났다.

 

모네는 '물의 작가'이자 '빛의 마술사'로 잘 알려진 19세기의 대표적인 인상파의 선구자다. 그의 삶은 물과 정원으로 가득했고 그의 그림은 '물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그의 그림은 눈에 비치는 빛을 색채로 표현하는 데 충실했다. 그래서 그의 '수련'은 눈에 비치는 그대로 몽환적인 느낌을 충실하게 표현해냈다.

 

우리가 미술사적으로 족적을 남긴 '피카소'같은 거장보다는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에 충실한 수련의 '모네'와 목가적인 '밀레', 혹은 여인을 그린 '모딜리아니'를 좋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몽환적인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은 때론 사진같은 사실적 묘사보다는 빛의 유희가 필요하다.

 

'말 그대로' 안동은 물의 도시이자 댐의 도시다. 낙동강이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데다 '안동댐'과 '임하댐'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댐이 가둬 놓은 거대한 호수는 이맘 때부터 봄까지 안동을 늘 안개 자욱한 물의 도시로 만든다. 이른 아침 출근할 때마다 만나는 강 위에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차를 돌려, 호수 저만치 안개 속으로 달려가도록 출근길을 유혹한다.

 

 

 

 

이 도시에서의 '무위도식'의 나날들은 때로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던 길을 가보고 싶어하는 모험심을 발동하게 한다.

 

'낙강'(洛江, 낙동강)의 물길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시내 쪽 강변길을 쭉 걷다가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평소에는 안동의 대표적인 여행 포인트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월영교'까지만 간다. 그 위쪽에 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월영교를 지나 민속촌으로 난 오른쪽 다리를 건너지 않고 안동댐 쪽으로 이어진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10여분 걸었을까 했는데 쭈삣쭈삣 앙상해진 은행나무길이 나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란 은행잎의 군무를 뽐내던 은행나무들이었다. 아마도 며칠 전 내린 가을비와 강풍에 '추풍낙엽'(秋風落葉)신세가 된 모양이다.

 

일부러 아무도 치우지 않았는지 길은 온통 은행잎들이 바람에 나뒹군다.

 

제대로 오지도 않은 가을이 속절 없이 갔다. 아직도 푸르른 메타세콰이어와 전나무가 도열한 숲으로 눈길이 갔다.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풍겨나는 그 숲 속으로 한 발 들어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아득해졌다.

 

원래 퇴계선생을 기리는 의미를 담아 조성한 '낙강물길공원'이 사람들로부터 '비밀의 숲'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낙강 물길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작은 연못과 숲 그리고 피크닉하기 좋은 햇살 좋은 가든. 수련이 가득 찬 연못에서는 분수가 저 혼자 물을 내뿜고 있다. 마치 모네의 정원에 있는 일본식 다리를 본뜬 아치형 다리까지 아담하게 자리잡은 숲은 지베르니 정원을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흡사한 분위기였다.

 

모네는 화가이자 정원사이기도 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정원을 가꾸면서 시시각각 바뀌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모델을 화폭에 옮겼다. 그의 모델은 그의 정원이었고 그의 그림은 수련연작이었다.

 

그가 21세기에 살아 안동에 여행을 온다면 수련연작을 이을 작품을 하나 더 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못에 자생하는 수련은 물의 상징이다. 가까운 하회마을이 강에 핀 '연꽃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부용촌'(芙蓉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회마을을 바라보는 강 건너가 그래서 '부용대'다. 중국 후난(湖南)성의 요우쉐이허(酉水河)의 아름다운 연꽃마을 '부용진'도 기억났다.

 

여행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연못가에서 물 속의 수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모네의 '수련'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가을햇살 가득한 날에는 도시락을 싸고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피크닉을 가야겠다. 파릇파릇한 정원은 피크닉하기에 좋다.

 

머릿속에서는 코르셋을 꽉 조여 허리를 잘록하게 한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깃털 달린 모자를 쓴 공작부인들이 비밀의 숲을 재잘거리며 산책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들이 우아하게 거닐 것 같은 그 가든에서는 '비밀의 숲'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걸그룹 소녀들이 모여 앉아 게임을 하고 그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수련이 보이는 기다란 벤치에 앉아서 가을날 햇볕을 한참이나 쬤다. 텀블러에 담긴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샌드위치를 '브런치' 삼아 먹으며 '어슬렁 어슬렁' 산책하기에 딱 좋았다.

 

연못과 아치다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안동댐 쪽으로 난 왼쪽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단풍나무와 자작나무 가득한 길을 걷는다. 붉디붉은 단풍나무 터널과 자작나무에서 나는 향기는 잠시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것이다.

 

 

 

안동루에 오르는 도중 드디어 퇴계의 시 한편 '陶山月夜詠梅'(도산 달밤에 핀 매화)을 만났다.

 

안동 곳곳에 남겨져 있는 퇴계 선생에 대한 흠모의 유적이다.

 

獨倚山窓夜色寒(독의산창야색한)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매초월상정단단)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이 떠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불수경환미풍지)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자유청향만원긴)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그 길 끝에서, 철제 계단을 하나씩 힘겹게 오르면 마침내 안동루(安東樓)에 닿아 낙강 물길이 펼치는 대장정의 발원을 볼 수 있다.

 

장관이다.

 

낙강의 물길은 잠시 이 댐에서 큰물로 만나 다시 새로운 발원지가 된 듯이 아스라이 낙동강 천리길 부산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대장관을 연출한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배성훈 기자 bsh@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