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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안동을 걷다, 먹다] 8. 안동역

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8. 안동역이 사라진다

 

첫눈이 올 것 같다.
안동역에 갔다.
첫눈은 첫사랑처럼 각별하다.
불현듯 찾아오는 첫눈은 첫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첫눈은 달콤하지만 처음이라 아련하기만 하다.

 

첫사랑도 각별하다.
첫눈처럼 살며시 찾아왔다가
첫눈처럼 재빨리 녹아버린,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있는 첫눈 같은,
첫사랑과 첫눈은
그래서 이란성 쌍둥이다.

 

안동역 앞에는 가수 진성의 '안동역에서' 라는 노래비가 있었다. 열차 출발을 알리는 역사내 스피커에서 '바람에 날려버린~~'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오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안동역에서를 흥얼거렸다.

 

'안동역에서'는 누구나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첫사랑의 추억을 되살려준다. 누구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이든 어디서든 만나자고 약속한 첫사랑'이 있지 않았을까?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인들은 늘 다음에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헤어졌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은 일종의 '번개팅' 약속이었다.

 

유신 시절에도 군부독재 시절에도 사랑은 시대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연인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첫눈은 소리도 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기적소리 끊어지고 기차가 오지 않을 때까지 나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안동역에서'는 히트를 예감하거나 예고한 노래가 아니었다. 작사가 김병걸 선생이 '안동사랑 모음집'이라는 CD를 제작하면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가수 진성에게 '용돈을 줄 테니 노래 한 곡 불러달라'고 해서 불러 2008년 제작 발매한 노래였다. 그런데 이 노래가 입소문을 타면서 서서히 대중의 인기를 끌었고 마침내 2012년 '전통가요' 1위를 차지했고 진성은 20년 무명가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안동시 홍보대사로 위촉돼 안동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

 

그 안동역이 곧 이전한다.

 

안동역은 '그 곳에 역이 있었네.'라는 자취만 남기고 운흥동 역사시대를 마감하고 역사를 이전할 예정이다. 첫눈이 내리게 될 때, 70년간 안동을 그 자리를 지켜온 '안동역'은 사라지고 안동버스터미널 옆으로 이전해 있을 것이다.

 

첫눈이 내리면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연인들은 어느 역으로 가야 할까? 지금의 안동역인가 아니면 이전하는 신역일까 궁금하다.

 

 

'첫사랑'에 실패한 우리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다음 사랑을 찾아 훌훌 떠난다. 첫사랑, 첫눈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안동역을 뒤로 하고 우리는 12월부터 신안동역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안동역에서'를 부르게 될 것이다.

안동역이 개통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10월16일이었다. 처음에는 김천과 안동을 잇는 118.1km '경북선' 철도구간이 완공되면서 '경북안동역'이라는 명칭이었다. 경북선은 김천을 시점으로 상주, 점촌 이어서 예천 구간을 차례로 개통했고 공사 7년 만에 안동까지 이었다. 이어 서울과 경주를 연결하는 중앙선 철로가 놓이면서 안동역은 명실상부한 중앙선의 중심역으로 자리 잡았다.

 

 

 

 

중앙선의 원래 명칭은 서울과 경주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경경선'(京慶線)이라고 불렸다. 경경선이 완공된 1940년 3월1일 당시 미나미 조선 총독이 참석할 정도로 성대하게 안동역에서 개통식이 열렸다.

 

철도 부설은 내륙오지 안동을 새롭게 각인시키고 발전시키는 계기였다. 안동역을 중심으로 안동의 도심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북선과 중앙선의 교통요지가 된 안동은 일약 경북 북부지역의 상업중심으로 발돋움했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위해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흘리는 눈물의 '이별역'이 되기도 했다. 안동역 구내의 급수탑(給水塔)은 12각형 구조물로 형태가 독특해 등록문화재 제49호로 지정돼 있어 안동역이 이전해 가더라도 보존될 예정이다.

 

요즘 안동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줄잡아 하루 600-700여 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안동역은 쇠락한 상태다. 서울과 대구 영덕, 상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속속 뚫리면서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은 급감했다. 가까운 영주와 의성을 오가는 단거리 승객이 대부분이다. 청량리나 부산으로 가는 장거리 승객은 손에 꼽힐 정도라고 한다.

 

안동역에서 영주 단양 제천 원주를 거쳐 청량리까지 가는 열차는 하루에 7편, 3시간 30분이 걸린다. 동해나 강릉까지 가는 열차 3편, 동대구역과 부산 부전역까지 가는 열차도 각각 3편씩 있다. 한번쯤 자동차 핸들을 내려놓고 KTX가 다니지 않는 안동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느리게 느긋하게' 여행하는 재미는 어떨까.

 

'우리 시대의 작가'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은 오래전 안동역 풍경을 생생하게 확인시켜 준다. 경북 영양 두들마을이 고향인 이문열 선생은 1960년대 초반 안동 중앙국민학교에서, 2년반 다니다가 상경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변경에는 안동역에 대한 그의 기억이 곳곳에 배어있다.

 

"철이도 안광읍 역에 내리면서부터 기분이 달라졌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안광에서의 어린 시절이 역광장 앞 거리의 낯익은 풍경으로 문득 생생하게 살아난 까닭이었다. 저만치 자신이 입학해서 이년 반이나 다닌 초등학교가 그리운 옛집처럼 눈에 들어왔고, 자기들이 살던 구시장 골목길도 조금만 정성들여 더듬어 가면 금세 찾아낼 것 같았다. 시외버스 정류장인 통일역도 3년전과 같은 자리에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아무리 변화의 속도가 느린 50년대 말의 3년이라 해도 그 때 나름으로는 꽤나 달라졌겠지만, 서울 같은 대도시를 본 눈에는 오히려 전보다 더 작고 초라해진 듯 보일 뿐이었다. 거기다가 사탕과 껌, 멀미약 따위를 펼쳐놓은 작은 목판을 메고 이 버스 저 버스를 옮아 다니는 난장이 아저씨도 그대로인걸 보고, 철은 자신이 그곳을 까맣게 잊고 지낸 게 스스로 이상할 지경이었다."(변경 제1부 불임의 세월)


이 대목에서 작가가 표현한 안광읍이 바로 안동이다. 소년 이문열이 기억하는 1960년대 안동역전 모습이다.

 

 

이 안동역사가 이전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인 임청각 복원사업의 일환이라는 점도 상기할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전인 2016년 5월 임청각을 방문, 석주선생의 후손들을 만나 임청각 복원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리고 2017년 8.15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문 대통령은 '임청각 복원 필요성'을 강조했다. 복원사업 계획이 수립되면서 임청각 앞을 지나는 철로 이전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비가 내린 후 기온이 영하로 급강하했다.

 

혹시 이번 주말이 아니더라도 첫눈은 곧 예고도 없이 내릴 것이다.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한 첫사랑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이번 주말 곧 사라질 안동역에 가서 첫사랑을 추억하자. '여기에 안동역이 있었다' 라며 안동역을 찾는 추억여행은 어떤가? 혹시라도 10년 전, 20년 전 그 사랑이 우연히 찾아온다면 만날 수도 있는 막연한 기대도 한 번 품어보면서 말이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어차피 지워야 할 사랑은 꿈이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아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밤이 깊은 안동역에서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밤이 깊은 안동역에서..."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배성훈 기자 bsh@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