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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0)풍자와 해학, 후덕한 인품으로 세상의 빛이 된 작가 라대곤

라대곤 작가는 1940년 군산시 신영동 구시장 입구의 ‘팔진당’이라는 과자 공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업을 접고, 김제의 신곡리로 이사하는 바람에 김제에서 초중고를 졸업하였다. 그는 농사꾼으로 시작해서 노숙자, 악극단 단원, 연탄공장 인부, 약장사 행상, 예비 소설가, 그룹과외 강사, 회사원 등을 거치면서 숱한 고생을 하였다.

그의 자전적 수필에는 어린 시절의 곤궁했던 삶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방 한 칸에서 8남매가 잘 때, 방 가운데의 까만 솜이불 속에서는 형제들의 발이 수시로 엉키기도 하였다. 특히, 맏형의 요절은 작가의 삶을 온전히 바꿔놓았다. 하루아침에 장남이 되어 가족들에게 매이게 되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입대하였다. 전방 근무 중 선임하사가 사준 술을 자주 마셨는데, 그 술값이 보급품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 이 사건은 훗날 그에게 공무원 시험도 볼 수 없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1965년 월간잡지 기자로 잠깐 근무하다가 술 공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하여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달아나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소달구지에 살림을 싣고 수도 없이 이사하는 바람에 장독대에는 성한 단지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폐기물 처리사업을 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다.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수필 문학』에 「고향집 감나무」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듬해 『문예사조』에 「두창이와 연주의 합창」이라는 소설로 데뷔하였는데, 이때 작가의 나이 54세였다. 출발은 늦었지만, 작품을 왕성하게 써서 악연의 세월』(1995)을 비롯하여 다섯 권의 소설집, 『망둥이』(2005)를 비롯한 세 권의 장편소설, 『한번만이라도』(1995) 등 네 권의 수필집을 썼고, 말년에는 암 투병 중에도 동화집 『깜비는 내 친구』를 3부까지 연달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탐미문학상(1998)을 비롯하여 전북문학상(1999), 표현문학상(2000), 채만식문학상(2006) 등을 수상하였다. 2011년에는 군산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라대곤 작가가 문단에 끼친 영향은 세 가지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영면(永眠)에 이를 때까지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고발하는 등 치열한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수필과 비평』의 발행과 ’신곡문학상‘제정 등으로 문단을 풍성하게 가꾼 점이다. 특히 『수필과 비평』의 발행인으로서 훌륭한 작가들을 발굴하여 배출하였으며 문인들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문단 환경을 크게 바꾼 점이다. 셋째는 고매한 인품으로 후학들에게 큰 모범을 보이신 점이다. 어려운 문인들을 보면 “돈 때문에 신경 쓰이면 좋은 글 쓸 수가 없어!”라면서 아낌없이 도와주셨고, 후배들의 출판기념회나 시상식 등 행사 끝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일일이 응원엽서를 보내주신 문단의 자상한 어른이었다는 점이다. 작가의 서거 3주기를 맞이하여 나온 ’신곡 라대곤 추모문집‘ 『어서 오소서』에는 작가와 후배 문인들이 나누었던 꿈과 사랑이 가득 이어졌다.

평론가 오양호는 작가는 군산의 백릉 채만식과 겨룰 만큼 훌륭한 역량을 갖췄다고 칭찬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창작이 뒷전으로 밀려서 그렇지 작가의 타고난 문학적 역량은 대단하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정종명은 작가는 화려하거나 섬세한 문체를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힘 있는 글로 막힘 없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력을 지녔다고 하였다.


호병탁은 작가는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통렬하게 쏟아냈다고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소설 『망둥어』에는 자신의 결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비틀린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잘 표출되었다고 했다. 특히 ‘망둥이’는 ‘욕심이 많아서 제 살을 찢어 미끼로 써도 사정없이 물고 늘어져 자살하듯 버둥거리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을 질타하였다고 했다.

작가는 『취해서 오십 년』이라는 수필집에서 보듯 술을 즐겨 마셨던 것 같다. 작가가 술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셨던 이유는 ‘따뜻해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살기 위해서’ 였던 것 아니었을까. 정휘립은 <‘라대곤 다시 읽기>라는 글에서 그의 작품들은 ’서민들이 겪는 소박한 애환의 일상사를 제재로 하여 생에 지치고 마음 한쪽이 헛헛한 외로운 존재들의 행렬을 그린 풍속화집 같다‘고 하였다.

작가는 나이 일흔에 췌장암, 담도암 수술을 연거푸 받았고, 체중이 20kg이나 빠지는 상황에서도 한순간도 붓을 놓지 않았다. 매우 쇠약해진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손자 경아와 민재에게 들려주는 『깜비는 내 친구』라는 동화집을 6부작으로 구상하였지만, 아쉽게도 3부까지만 썼다. 이 동화집에는 호수 위로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는 평화로운 동산의 이야기를 그의 손자와 손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작가의 소망이 담겨 있다.

 

 

 

김영(전북문인협회 회장) 시인은 작가를 ’권위적이지 않고 높임받기를 좋아하지 않으신 지구에 온 어린 왕자‘라고 회고한 바 있다. 후덕한 인품을 지닌 작가로서 후배들과 나눈 그의 꿈은 오래오래 우리 문단에 아름다운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서거 3년이 되던 해인 2016년 7월 9일 김제시 청하면 청운사에 ’라대곤 문학비‘가 세워졌는데, 그 뒷면에는 작가에 대한 문단의 안타까움과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하는 김남곤 시인의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오늘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산 하나가 장중하게 허물어지던 그해 봄날, 우리들은 그대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라며 애도했노라.

 

*참고 : 신곡 라대곤 추모문집 『어서 오소서』(2016), 안도(전 전북문인협회 회장) 『라대곤 소설가 자료』

이강모 kangmo@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