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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이병주 탄생 100년] 격동의 근현대사 소설로 그린 ‘한국의 발자크’

[탄생 100주년 문인을 조명하다 (상) 이병주 소설가]
하동 출생…호‘나림’ 큰 숲 의미
‘관부연락선’·‘산하’ 등 80여편
인간·역사 등 날카로운 통찰
100주년 학술대회·문학제 개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인 가운데 김수영 시인과 이병주 작가는 그 문학적 위상이 남다르다. 삶이 역동적이었고 작품 세계가 하나로 집약되지 않을 만큼 다채롭고 한편으로는 도발적이었다. 무엇보다 시대와 불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한해, 한국문학에서 남다른 위상과 저마다 독특한 작품세계를 개척했던 두 문인, 이병주 작가와 김수영 시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다.

섬진강을 지나 전라도 끝자락을 넘어서면 하동이다. 지리산의 줄기는 언제나 근엄한 자태다. 지리산은 심지 굳은 사내의 느낌이 묻어난다. 쉽게 곁을 주지도, 그렇다고 한번 내 준 품을 쉽사리 거두지도 않는다. 지리산은 명민하면서도 따뜻한 그러면서도 지혜로운 산이다.

 

 

그에 반해 하동은 시정(詩情)이 넘치는 고장이다. 왜 아니겠는가. 강의 동쪽이라는 지명부터 외지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앞으로 그다지 넓지 않은 벌판이 펼쳐져 있고, 지리산을 따라 흘러온 강줄기가 벗하고 있다. 하동에 가는 이들은 지리산과 섬진강, 비옥한 땅 모두를 보게 되는 호사를 누린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한다사군으로 불렸고 경덕왕 때 지금의 하동이 되었다. 그렇듯 지명과 풍광에는 오랜 세월의 역사가 담겨 있다. 섬진강 동쪽을 아우르는 비옥하면서도 평온한 이미지는 하동이 지닌 매력이다.

하동이 낳은 작가 나림(那林) 이병주(1921~1992). 아니 지리산이 품고 기른 작가다. 지리산을 터전으로 성장했으며 이후 지리산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그의 작품의 자장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확장되고 수렴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숲’, 또는 ‘큰 숲’이라는 의미의 호 ‘나림’은 질곡의 근현대사 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의 성정과 천품을 드러낸다. 숲은 결코 무언가에 휩쓸리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큰 숲에서 이병주의 작품이 태동했고, 독자들은 문학세계라는 숲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동에서 태어난 이병주는 후일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를 졸업했다.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때는 국제신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필명을 날렸다. 그러던 중 필화 사건으로 2년 7개월을 복역하기에 이른다. 이후 1965년 늦은 나이인 마흔 넷에 ‘세대’ 7월호에 ‘소설· 안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며 늦깎이 작가로 데뷔했다. 이병주 문학의 원형이라 평가받는 이 작품은, 필화사건으로 겪은 옥살이의 부당성을 그리고 있다. 인간과 역사, 전쟁과 이데올로기 등에 대한 특유의 날카로운 시각이 이면에 드리워져 있다.

“나는 지리산을 실패할 작정을 전제로 쓴다. 민족의 거창한 좌절을 실패 없이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내게는 없다. 좌절의 기록이 좌절할 수 있을 수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최선을 다해 나의 문학적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다.”

1972년 이병주는 장편소설 ‘지리산’ 연재를 시작하며 그렇게 말했다. ‘지리산’은 그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첫손에 꼽는 소설이다. 작품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이 점철된 근대라는 시간을 관통한다. 일제말부터 시작해 해방과 6·25전쟁, 휴전협정까지를 다룬 소설은 민족사적 모순과 비극을 담아내고 있다.

 

 

이병주는 작가후기(‘지리산’, 한길사, 2006)에서 이렇게 말한다. “해방 직후부터 1955년까지 꽉 차게 10년 동안 지리산은 민족의 고민을 집중적으로 고민한 무대이다. 많은 청년들이 공비를 토벌한다면서 죽었고, 역시 많은 청년들이 공비라는 누명을 쓰고 죽었다. 그들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두고두고 민족사의 대과제가 될 것이다.”

이밖에 이병주는 일제 말 지식인들의 생존과 내면을 형상화한 ‘관부연락선’을 비롯해 해방공간부터 자유당, 4·19에 이르는 시간을 조명한 ‘산하’, ‘바람과 구름과 비’ 등 8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등단 후 생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27년 동안 한달 평균 1000여 매의 원고를 쓰는 초인간적인 글쓰기를 지속했다.

그에게 소설은 증언의 기록이기도 했다. 역사를 모티브로 한 소설은 나름의 객관화를 해 거리두기와 다양한 시각을 견지했다. 해설자로서 시대를 평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병주문학관 정문 앞에는 날카로운 펜촉 조형물이 서 있다. 형형한 그의 문학정신이 마치 현현돼 있는 것 같은 아우라를 발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도 거대한 만년필 조형물을 만난다. 천장에서부터 종이를 뚫고 내려온 만년필은 그가 여전히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는 환시(幻視)를 느끼게 한다.

올해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지난 4월에는 영호남 학술세미나가 이병주문학관에서 열렸다.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는 문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는 김종회 문학평론가가 ‘한국 대중문학의 정점에 이른 이병주 소설’을 주제로 강연했다.

지난 10월에는 문학과 생애를 기리는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가 역시 문학관에서 개최됐다. ‘이병주 문학선집’ 증정식에 이어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진행됐다. ‘불세출의 작가 이병주를 말한다’라는 주제 아래 김종회 문학평론가의 기조강연, 임헌영 문학평론가, 이승하 중앙대 교수, 손혜숙 한남대 교수 등이 주제 발표를 통해 나림의 문학을 조명했다.

이병주는 본질적으로 이야기꾼이다. 그가 ‘한국의 발자크’라고 불리는 것은 쉴 틈 없이 풀어낸 이야기 꾸러미에서 연유한 것일 테다. 다양한 작품 세계, 방대한 분량에서 그를 필적할 작가는 없다.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그의 작가적 신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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