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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마리 앙투아네트 “내일은 내가 단두대에 갈 차례인가?”

[유럽 인문학 기행-프랑스] 콩시에르주리

1793년 1월 21일 밤.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는 파리 인근 ‘템플 프리즌’의 조그마한 독방에서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감방에 갇힌 이후 식사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이날따라 특히 음식을 전혀 입에 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루 종일 가슴이 뛰면서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이러지? 루이 16세 전하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 루이 16세가 1792년 ‘10월 8일 사건’으로 국왕 자리를 뺏기고 혁명의회로부터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사형 선고를 받은 이후, 그녀의 가족은 템플 프리즌에 수감됐다. 다들 한 방에 모여 있는 게 아니라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는 물론 어린 아들 루이 샤를, 딸 마리 앙투아네트 테레사 모두 독방에 갇히게 됐다.

 

“왕후마마.”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누군가 감방 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문에 달린 조그마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 온 이후 일요일마다 그녀의 가족을 위해 미사를 열어주던 에지워스 신부였다. 그가 이렇게 늦은 밤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감방으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마마, 슬픈 소식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파리에서 전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남편이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지워스는 창살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에 반지가 있었다. 그녀가 남편과 결혼할 때 선물로 줬던 반지였다.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마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전하의 마지막 유품입니다.”

 

 

반지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전한 에지워스 신부는 더 이상 말을 남기지 않고 돌아섰다. 점점 작아지는 그의 발자국 소리 하나하나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귀에는 마치 자신을 부르는 남편의 애절한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반지를 쳐다보았다. 오스트리아의 어머니가 먼 이국 땅으로 시집가는 딸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반지였다. 그녀는 반지를 남편의 손가락에 끼워줄 때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상념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음날부터 식사를 거부했다. 건강은 날로 악화됐다. 폐렴에 시달렸고, 요도암에도 걸렸다. 이 때문에 수시로 피를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의회의 어느 누구도 그녀의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루이 16세처럼 사형시키자고 주장했고, 다른 일부는 오스트리아에 잡혀 있는 전쟁포로들과 그녀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미국으로 망명을 보내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1793년 8월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시에르주리로 이감됐다. 죄수번호는 280번이었다. 겨우 여덟 살이었던 아들 샤를은 신기료장수 손에 맡겨졌다. 이감에 앞서 옛 왕당파 신하들에게서 탈출시켜주겠다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지만 그녀는 모두 거부했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마지막 시녀 로잘리 라몰리에 뿐이었다.

 

 

콩시에르주리는 원래 중세 시대에는 왕궁이었다. 1358년 샤를 5세가 궁전을 폐쇄하고 강 건너 루브르 궁전으로 거처를 옮긴 뒤부터 행정 기관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1391년 감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잡범과 정치범이 섞여 수감돼 있었다.

 

프랑스의 다른 감옥들과 마찬가지로 콩시에르주리에서도 신분, 재산, 연줄에 따라 죄수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부자 죄수는 침대, 책상 등을 갖춘 독방에서 책도 읽으면서 그다지 힘들지 않게 지냈다. 반면 돈 없는 죄수들은 습기가 많고 벌레가 우글거리는 ‘오블리트’에 갇혀 살았다. 오블리트는 ‘잊혀진 공간’이라는 뜻이다.

 

콩시에르주리는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단두대에 끌려갈 사람들을 가둬두는 곳으로 바뀌었다. 한때는 남녀 죄수 1200여 명이 한꺼번에 갇혀 있었다. 이곳에 감금돼 있다 단두대로 향한 사람은 모두 26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국민의회는 10월 14일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죄명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초호화판 파티를 열었고, 오스트리아로 엄청난 양의 보물을 빼돌렸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들 샤를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아들 샤를이 고백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강요한 사람들은 국민의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재판부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마지막으로 해명할 시간을 주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판정을 가득 메운 나이 든 여성들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여기 오신 많은 어머니, 할머니들. 국민의회는 저보고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하는군요. 제가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말하는군요. 어머니, 할머니들께 여쭤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프랑스의 모든 어머니들을 모독하는 저 말을 믿으시는가요?”

 

눈물 섞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설이 이어지자, 재판정에 있던 여성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는 “아무리 왕비가 미워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되지”라거나 “해도 너무 한다”라는 등 마리 앙투아네트를 옹호하는 발언도 터져 나왔다. 재판부는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을 도중에 끊고 재판을 중단시켜버렸다.

 

재판은 이틀 뒤 오전에 다시 열렸다. 재판부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반역죄와 근친상간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번에는 그녀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도 굳이 변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판을 마치고 콩시에르주리에 돌아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감옥에 갇혀 있던 시누이 엘리자베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녀의 순수한 양심, 진실한 종교적 신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담긴 편지였다. 편지는 엘리자베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녀가 쓴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엘리자베스, 마지막 편지를 보내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달될지는 모르지만…. 저는 사형선고를 받았답니다. 그래도 마음은 차분하네요. 남편처럼 저도 마지막 순간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요. 다만 가여운 아이들을 두고 떠난다는 게 너무 슬퍼요. 딸에게 항상 동생을 잘 보살피라고 전해주세요. 재판 도중에 들었는데, 아들 샤를과 딸 엘리자베스가 당신에게서 떼어졌다더군요. 아들에게는 언제나 누나에게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해주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말을 절대 잊지 말라고 이야기해주세요. 우리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저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사랑을 느꼈던 성령의 품 안에서 세상을 떠날 거예요. 살면서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모든 잘못에 대해 신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요.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에게 저질렀던 모든 악행에 대해 저들을 용서한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를 다 쓴 뒤 시녀 라몰리에에게 주었다. 라몰리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어깨를 도닥인 뒤 가볍게 껴안아주었다.

 

 

그날 오후 간수 두 명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른 방으로 끌고 가 머리를 모두 깎아버렸다. 그녀는 삭발을 당하는 동안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삭발을 마친 간수들은 그녀를 마차에 태워 콩코르드 광장으로 데리고 갔다. 남편 루이 16세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 올라가 샤를 앙리 상송에 의해 목이 잘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누이 엘리자베스는 편지를 받아보지도 못한 채 1794년 처형됐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 샤를은 이듬해 감옥에서 죽었다. 딸 마리 앙투아네트 테레사는 전쟁포로와 교환돼 외가인 오스트리아로 갔다.

 

프랑스대혁명이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부활한 뒤에도 콩시에르주리는 여전히 감옥으로 활용됐다. 이때는 고위급 죄수들만 갇혔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됐던 방은 기도실로 바뀌었다. 1914년이 돼서야 콩시에르주리는 감옥으로서의 역할을 중단했다. 그리고 대중에게 개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파리에서 유명한 관광지로 변모해 해마다 수백만 명이 찾고 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