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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부안 매창공원…조선 최고 여류시인의 시혼, 문화로 꽃피다

원래 이름은 ‘계생’ 또는 ‘향금’
시와 서, 거문고에 뛰어나
황진이와 함께 조선 여류문학 대표
상례의 대가 유희경과 깊은 교분
부안읍 봉덕리에 매창 공원
매창테마관·체험실 등 갖춰

 

그녀는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 문인이었다.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계생 또는 향금이었다. 호는 ‘매화가 핀 창’이라는 뜻의 ‘매창’(梅窓)이었다. 다분히 문예적이며 운치가 감도는 호다.

그녀는 시와 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문에 능했으며 거문고를 잘 탔다. 오늘날로 치면 전천후 아이돌스타다. 다재다능한데다 문리에 밝았다.

 

 

바로 이매창(1573~1610)이다. 고전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했던 이들이라면 이매창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혹여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이별을 소재로 한 시 가운데 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새하얀 배꽃이 화르르 떨어지는 날, 여인은 님과 이별을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가을 낙엽이 떨어지던 날, 불현 듯 이별했던 님 생각이 난다. 멀고 먼 거리여서 만날 수 없는데, 사무친 그리움만 꿈처럼 아득할 뿐이다.

 

 

그녀의 부친은 부안 아전(衙前)이었던 이탕종이었다. 서녀였던 데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탓이었을까. 매창은 일찍이 예술에 재능을 보였다. 아마도 신분상의 제약과 기질적인 외로움이 그녀로 하여금 시와 서, 악에 몰입하게 했던 것 같다. 매창은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는데, 그것은 후일 깊이와 심미적인 정조의 시조를 이루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뜨게 된다.

 

 

매창은 언급한 대로 황진이와 함께 조선 여류문학을 대표한다. 대표시 ‘이화우 흩뿌릴 제’는 시가 내재하고 있는 서정성과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 기생이라는 신분과 연계돼 지극한 울림을 환기한다. 1887년 간행된 ‘부안지’에는 “관비 계생의 시다. 계생은 부안의 유명한 기생으로 호는 매창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시’, ‘호는 매창’이라는 어휘와 ‘관비 계생’이라는 어휘는 사뭇 부조화한다. 한 여인의 자존을 뿌리째 흔드는 말이다. 언어는 존재를 규정하는 집이라 하지 않던가. 그녀의 시는 시대를 초월해 오늘에까지 생명력을 확보하고 있는데 ‘관비 계생’은 여전히 그녀를 관에 소속된 기생으로 규정한다.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매창 공원은 적요하다. 이곳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문인을 기리기 위한 공원이다. 인근 주민들이 산책을 하거나 공원 한켠에 앉아 봄맞이를 하고 있다. 봄은 그렇게 시나브로 와 있는데, 매창의 이름을 딴 공원은 한적하고 쓸쓸하다. 전국에 여성의 이름을 딴 공원이 이곳 외에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매창은 부안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기생임에도 유림들이 제를 지낼 정도이고, 사후에 지역에서 문집을 간행한 걸 보면 그녀의 존재가 어떠한지 짐작이 간다.

매창의 정인(情人)은 촌은(村隱) 유희경(1545~1636)이었다. 그는 상례에 밝은 예학의 대가였다. 비록 천민 출신이지만 가례뿐 아니라 시문에도 능통했는데 문헌에 따르면 서경덕의 문하인 남언경에게 가례를 배워 사대부의 장례를 주관했다. 물론 그 바탕은 유희경의 천부적인 시재에서 비롯됐을 거였다. 흔히 그를 가리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양반이 아닌 중인 이하 하급계층을 위항인(委巷人)이라 칭한 데서 유래한 문학이다.

한편으로 유희경이 장례 예법에 능한 데서 보듯 그는 충절 또한 깊었다. 임란 때는 의병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고 선조는 그에게 포상과 교지를 내렸다. 문집으로 ‘촌은집’이 전하며 상례를 담은 ‘상례초’를 남겼다.

그가 남긴 시도 매창공원에 있다. ‘매창을 생각하며’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매창과 유희경은 어떻게 만났을까. 그들이 만난 건 매창이 18세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591년경으로 보인다. 부안에 들른 서울 선비는 매창의 시재에 반한다. 어쩌면 그는 그녀의 출중한 시문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 모두 천민 출신이라는 아웃사이더 의식을 공유했을 터다. 매창은 시객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촌은 또한 그녀의 시재를 단번에 가늠했다. 28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문학을 매개로 사랑을 나눈다.

공원을 에둘러 다양한 시비가 늘어서 있다. 두 사람이 나눈 시뿐만 아니라 가람 이병기가 매창의 무덤을 찾아와 지었다는 ‘매창뜸’이라는 시비도 보인다. 가을 단풍이 들면 형형색색의 나뭇잎 사이로 절절한 시 구절이 흩날릴 것만 같다. 매창과 유희경의 교유는 그렇게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우리 문학과 문화를 일군 격조있는 문화로 다가온다.

공원에는 허균의 시를 새긴 비도 보인다. 매창이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1569~1618)과도 교유했음을 보여준다. 허균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지만 진정으로 매창을 존중했다. 아마도 그의 누이 허난설헌에서 보여지는 문장의 깊이와 격조를 그녀에게서 보았을 것 같다. 매창은 그렇듯 당대 문장가들과 시문을 매개로 우정을 나누었다. 더러 변산반도와 내소사 등을 유람하며 시와 문, 예술을 논했을 것이다. ‘어수대에 올라’와 같은 시는 변산의 우슬재 등을 배경으로 인생무상을 읊은 시로 유명하다.

 

 

 

공원 뒤편에는 매창테마관이 자리한다. 지난 2018년 개관한 180평 규모의 이곳에는 매창 전시실과 한복 입기 등 체험실이 갖춰져 있다. 국악과 시낭송이 가능한 세미나실도 있어 다양한 행사가 가능하다. 봄이면 이곳을 배경으로 매창문화제가 열린다. 시화전, 사생대회, 백일장대회 등을 통해 부안이 낳은 조선 최고 여류 시인을 기린다.

공원을 돌아나오며 불현듯 부안 출신 신석정 시인(1907~1974)의 말이 귓가를 울린다. 그는 ‘송도삼절이 박연폭포, 황진이, 서경덕이라면 부안삼절은 직소폭포, 매창, 유희경’이라 했다. 매창공원 한쪽에 그녀의 묘가 있다. 풍우에 씻겨진 오래된 비문은 그녀의 쓸쓸했던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 생전에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그녀는 묻혔다.

봄바람이 나부끼는 무덤 앞에서 ‘자존의 인간’ 매창의 시와 생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그녀의 거문고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것 같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