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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보릿고개 넘자' 야산 깎고 다져 옥토 가꾼 시절

[강원일보 창간 77주년 취재사진 현장 속으로]1974년 춘천 지암리

 

 

1960년대 초 연간 500만석 이상 곡식 수입할 만큼 식량수급 열악
1964년 개간촉진법 공포 식량 증산 7개년 계획 수립 농지면적 늘려
1972년 신품종 통일벼 확대로 생산 급증 … 1977년 주곡 자급 달성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배곯던 시절 이야기다. 봄철만 되면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춘궁기(春窮期)라는 것이 찾아왔었다. 기성세대에게는 ‘보릿고개'가 더 일반적이지만 이제는 문학작품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 돼 버렸을 정도로 아련한 단어들이다.

이 시기는 지난해 가을에 걷은 식량이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초여름 보리가 수확되기 전까지 굶주림을 겪어야만 했던 궁핍한 우리네 삶의 기간을 지칭한다. 딱히 먹을 것이 없던 민초들은 하릴없이 풀뿌리와 나무껍질까지 캐 먹었다고 하니 당시의 어려움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그것이었다. 추수 전 찾아왔다는 피고개(추수하기 전, 피도 아직 패지 아니할 무렵에 농가의 식량 사정이 어려운 고비)가 있긴 했지만 그 심각성에서는 보릿고개가 한 수 위였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니 “춘궁맥령난월(春窮麥嶺難越) 춘풍기풍춘색궁색(春風飢風春色窮色)”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풀이하자면 “봄철 궁핍함으로 보릿고개 넘기 어려우니, 봄바람도 배고픈 바람이고 봄의 색깔도 궁핍한 모습”이라는 뜻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연간 500만석 이상의 곡식을 외국에서 들여올 만큼 식량 수급 사정이 열악했다고 한다. 보릿고개는 연례 반복적으로 이어졌고, 밥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정부의 식량정책 기조도 ‘식량자급 기반 구축'에 있었다.

이 같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농촌진흥청이 발족(1962년)했고 개간촉진법도 공포(1964년)됐다. 식량증산 7개년 계획 수립과 함께 농업증산대책본부 등의 설치도 이때 이뤄졌다. 증산(增産)을 통한 식량자급을 위해서는 품종 개발로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늘리는 것도 필요했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의 농지면적을 늘리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식량증산을 위해서는 ‘개간'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기 때문에 정부는 집중적인 재정투자와 함께 군용장비까지 동원해 개간작업에 올인했다.

이 시기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지원을 받아 농토 확대를 위한 개간 적지 조사가 함께 시작됐는데, 이 내용을 통해 모두 16만3,000㏊의 개간 적지를 찾아냈다. 이는 1970년대 중반에 추진된 ‘대단위 야산개발사업'의 기초가 됐다고 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정부는 주곡자급을 국정의 주요 과제로 삼아 식량증산을 추진했다. 때마침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가 1972년부터 확대되면서 수확량이 다른 품종보다 30% 높게 나타나 식량증산은 속도를 낸다. 이러한 노력으로 1974년에는 쌀 3,000만석을 달성했고, 1977년 4,000만석을 돌파하며 마침내 주곡 자급을 달성하게 된다.

사진은 1974년 춘천 지암리의 분주한 어느 오후를 담은 모습들이다. 사진①은 아낙네들이 머리에 저마다 세숫대야를 이고 호미로 골라낸 돌멩이를 한가득 실어 나르는 장면을 포착했다. 변변한 놀거리가 없는 아이들은 한쪽에서 멀뚱히 엄마, 할머니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고, 건너편에 ‘증산'이라고 쓰인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곳은 계단식으로 논이 조성돼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평지보다는 산이 많아 비탈진 땅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강원도에서 개간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개간 방법 중 하나였다. 이를 ‘계단식 개간(비탈진 땅을 계단 모양으로 개간해 경작지를 만드는 일)'이라고 부르는데 1960년대 초 개간적지 조사를 기반으로 처음 시도돼 전국적으로 확대된 개간 방식이었다. 사진②는 장정들이 나무지게와 리어카를 이용해 흙과 돌을 나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 뒤로 수많은 사람이 산을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인데, 아마도 이들은 산을 깎고 다지는 개간작업을 통해 계단식 개간지를 만들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하게 되자 증산 위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론도 나오게 된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농어민 소득증대 사업과 농산물 가격의 안정, 유통 근대화, 그리고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 등 농정 목표가 다양화된다.

오석기기자

도움말=국가기록원·한국농어촌공사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