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타이베이' 두 배로 즐기기

국립고궁박물원 70만점 역사 빼곡…장제스 총통 애착 가득 중국 예술 정수 총집합
지우펀 언덕배기 붉은빛 상점 촘촘…1890년 금가루 발견되며 마을도 덩달아 급성장

 

1949년 12월, 타이완에는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후 국민당 정부를 옮겨 온 중화민국 장제스(장개석, 蔣介石)의 국부천대(國府遷臺)가 있었다. 타이완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해상의 중심지여서 17세기부터 스페인과 네덜란드에 점령당했다가, 이후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지만 청일전쟁 이후 50년 동안의 일본 식민통치 하에서 2차세계대전으로 막 벗어난 참이었다.

 

1975년까지 총통 겸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을 지배한 장제스는 중국 본토 공산당에 대해 산발적인 공격을 계속하며 계엄을 유지하다가, 사후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그 뒤를 이어 아버지가 생전 실시하던 계엄을 해제하는 등 민주정치의 기초를 다졌다. 그 뒤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최초의 본토박이 총통 리덩후이에서 천수이벤, 마잉주를 거쳐 현재의 차이잉원 총통 체제이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

 

장제스는 중국 전통문화에 애착이 많았다. 평소 지론이 '나라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문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었고, 국공내전 와중 패주하면서도 베이징 자금성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29만점과 전국 각지의 유물들을 타이완으로 가져왔다.

 

 

사실 유물의 상당수는 열하사변 시기 일본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미리 난징과 상하이로 옮겼다가 이후 중일전쟁 전황에 따라 쓰촨성 오지에 분산 보관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장제스와 국민당의 유물 대피과정은 눈물겨울 정도로 지난했다고 한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의 어마어마한 유물들 앞에 섰을 때 '은주진한수당송원명청'이라 외던 옛 역사책과 함께 그 고난도 느껴져 저절로 손으로 벌린 입을 가렸다.

 

이제는 거의 70만점에 달한다는 유물은 계속 교체 전시가 될 정도이니 특히 보물 중의 보물인 송, 원, 명, 청 네 왕조의 황실 유물을 보라 여행 안내서에 씌어 있다.

 

건륭제의 옥새(碧玉璽), 서태후의 무덤 부장품이었다는 배추 모양의 취옥백채(翠玉白菜), 올리브 씨앗에 조각한 감람핵주(橄欖核舟), 육즙이 흘러내릴 듯한 동파육을 그대로 재현한 육형석(肉形石), 비취 병풍 등은 역시 감탄할 만했다.

 

 

당 회소(懷素)의 자서첩(自叙帖)과 궁악도(宮樂圖)는 당 현종과 양귀비를 떠올리게 했고, 그러다보니 서주 말기의 모공정(毛公鼎) 앞에서는 진시황의 이복형 소양왕이 힘겨루기로 들어 올리다가 정강이가 부러져 죽었다는 구정(九鼎)도 혹시 여기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우리 백제금동대향로를 닮은 초기 형태의 중국 향로들 앞에서는 진흙더미에 숨겨져 있던 그 향료가 역시 최상급 박래품이었던가 의심도 하다가,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을 넘겨 허둥지둥 그곳을 뛰쳐나오게 되었다. 가이드가 이곳 소장품을 다 보려면 백년도 더 걸릴 거라고 무안해 얼굴이 붉어진 나를 보며 눙친다.

 

◆비정성시(非情城市) 혹은 신(神)들의 저자거리 지우펀

허우샤오셴감독의 1989년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 A City of Sadness)는 일제 식민지 이후 느닷없이 국민당 정부를 이끌고 내려온 장제스정권 하에 벌어진 타이완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를 다룬 것이다.

우리나라의 4·3사건이나 5·18사건 등에 비견될 역사의 한 단면을 아프게 그려낸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이후 동양에서 두 번째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해 허우샤오셴감독을 세계적 반열에 올렸다. 또한 영화는 잊혀져가는 탄광도시를 세계적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타이완 북부 신베이시 루이팡구, 해안을 마주하고 있는 산맥 위의 지우펀(九份)이다.

 

 

1890년 어느 날, 이곳에 철도를 깔던 인부가 금가루를 발견했고, 근방 하천에서 매일 수 킬로그램에 달하는 사금이 발견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너나없이 금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타이베이 금광 열풍, 골든 러시(gold rush)였다. 금광 옆 작은 마을 지우펀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1895년 청일전쟁의 전리품처럼 타이완을 할양받은 일제에 의해 최고조에 달했다. 타이완 광산업에 진출한 후지타기업은 황금을 쓸어 담아갔고, 지우펀은 그야말로 상전벽해, 지나가던 동네 개가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흥청망청해졌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황금광시절인 '포티나이너(Forty-niner, 49er)'를 겪은 미국 외교관 제임스 데이비드슨은 그 소동으로 지우펀에 게딱지 같은 집들이 들어서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이토록 많은 가옥들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몰려 지어진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떤 건물들은 다른 건물 위에 덧붙여 지어진 것 같고, 어떤 건물들은 아예 들어갈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 모든 것이 일제 통치기의 일이었다.

 

2차세계대전, 일제는 지우펀과 인접한 진과스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포로들을 금광에서 강제로 노역시켰다. 하지만 모든 것은 덧없었다. 끔찍한 전쟁은 급기야 끝이 났고 금광은 쇠퇴기에 접어들어 1971년 결국 완전히 폐광되었다.

 

지우펀은 거의 잊혀진 마을이 되어버렸다. 그 쇠락하여 잊혀진 도시를 부활시킨 것이 바로 영화 비정성시다. 영화 속 지우펀의 고풍적인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완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배경과 닮았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이 몰려들었고 드라마 '온 에어'가 지우펀에서 제작되자 우리 관광 일정에도 빠지지 않는 곳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중에 영화의 배경이 이곳을 모티브로 한 것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어쨌든 지우펀의 오래된 집들과 구불구불한 골목과 계단 그리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은 정감 있고, 홍등을 내건 수치루(竪崎路)는 밤낮 없이 그윽했다.

 

 

금광시절의 극장 승평희원(昇平戲院)벽에는 영화 '연연풍진' 낡은 포스터가 습기에 젖어 붙어있고, 아매차루(阿妹茶樓) 이층 탁자에서 바라보는 앞바다는 한없이 부드럽다. 타이완의 지형과 기후가 차나무에 더없이 좋으니 여기서 백호우롱차(白毫烏龍茶)나 철관음차(鐵觀音茶)를 마시며 희미해져가는 옛 사랑을 추억하는 듯 사람들이 멍하니 앉아 있다. 이렇게 지우펀은 현재 세계 도시 재생의 전범으로도 손꼽힌다.

 

돌아오는 길 진과스(金瓜石)에 들러 황금박물관의 거대한 금괴를 직접 손으로 만져도 보고 번산5갱(本山五坑)을 거쳐 당시 히로히토왕세자를 위해 후지타기업이 정성스레 지었다는 태자빈관(太子賓館)과 황금신사(黃金神社)를 지나오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부인(否認)과 장제스의 2·28 그리고 그의 계엄령을 오래 생각했다. 혼재된 역사는 혼재된 욕망이 빚은 것이라는 말, 허우샤오셴과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은 먼 미래로부터'라는 시인 김경주의 장시 '비정성시' 중 한 구절도 계속 머리 속을 맴돈다. 어쨌든 이제 지우펀은 신들의 저자 거리다.

 

박미영(시인)

 

많이 본 기사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