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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짙은 녹음 속 선명한 토벌대의 흔적

(134)시오름 주둔소
1950년대 초 무장대 토벌 목적
중산간·해안마을 주민 동원시켜
쌓아올린 성담 감시·통제 수단
보존된 원형…생생한 역사 대변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 동쪽 인근의 ‘시오름 주둔소’

지난 호에 연재한 영남리에서 동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오름 주둔소를 다시 찾았다. 시오름 주둔소는 제2산록도로와 1100도로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숨어 있었다.

영남천과 악근천 계곡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 곧 제6산록교가 나타나고, 그 동쪽에 위치한 동백꽃 안내판에서 남쪽으로 300m 남짓 내려가면 성채 같은 시오름 주둔소가 나타난다. 시오름 주둔소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경찰토벌대가 무장대와 민간인과의 연결을 차단하고 감시하려 한라산 주위에 설치한 40여 주둔소 중 하나이다.

서귀포시 서호리 마을의 중산간에 위치한 ‘시오름 경찰 주둔소’는 1950년대 초반에 중산간 마을인 서호리와 호근리 주민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인 강정리와 법환리 등지의 주민이 총동원되어 한 달 만에 쌓았다고 한다.
 

 

주둔소를 구축하려 동원된 마을 중에는 주둔소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영남리 마을은 없다. 영남 마을은 4·3 초기인 1949년 초에 완전히 폐촌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오름 주둔소는 삼각형 모양으로 한 면의 길이 40여m, 높이 3m, 폭 1m, 전체 둘레는 120m 정도이다.

1950년 초 서귀포경찰서의 지휘 아래 인근 여러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인근지대의 돌들을 지어 나르며 피눈물로 쌓은 작은 성채 모형의 시오름 주둔소는, 성벽 곳곳에 총안(총을 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구멍)도 남아있다. 당시 한라산에 남아 있는 무장대의 토벌을 위한 전진기지로 지어진 주둔소 중에는 인근의 수악주둔소, 녹하지주둔소와 함께 시오름 주둔소가 거의 원형으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제주도 경찰 주둔소 설치 연대기

1948년 10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4·3에 대한 강력한 진압정책을 실시하려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후임 송요찬 중령)를 새로 설치하였다. 제주도에 한해 계엄령(대통령령 31호)이 11월 17일 선포되고,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과 2월에 있었던 군경에 의한 진압작전이 점차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1949년 봄에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어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세워나갔다. 폐허가 된 중산간 마을 재건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석성을 쌓았던 것이다.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함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한라산에 남아있는 무장대에 대한 진압과 토벌작전은 제주경찰이 주도하였다. 1951년 창설된 제100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이원용 총경)는 필승중대·한라중대·백록중대·신선중대·뇌격중대·충성중대로 편성하여 무장대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이보다 앞선 1951년 1월부터 3개월 동안에는 해병1개 중대가 제주경찰과 합동으로 진압적전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80여 명의 잔여 무장대는 기후가 온화하면서도 지형이 험한 한라산 남동쪽인 서호리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잔존 무장대에 대한 방어와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한라산 밀림지대와 중산간 마을 사이의 주요 지점마다 40여 개소의 주둔소를 구축했다.

시오름 주둔소는 바로 이 시기에 축성되었다. 이러한 주둔소는 일제 강점기 당시 한라산 해발 600m 고지를 원형으로 돌아가며 개설한 이른바 ‘하치마키’ 도로를 따라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삼각형 또는 사각형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무장대와 주민들의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는 높은 지형이나 오름 등지에 세워졌다. 당시 서귀포 경찰서 관내에는 시오름 주둔소를 비롯하여 모라이 오름·법정오름·녹하지오름·쌀오름·수악 등지에 주둔소가 속속 구축되었다.
 

 

▲시오름 주둔소에서 무슨 일이

단단한 겹담으로 쌓은 시오름 주둔소 성벽에는 군데군데 총구를 들이댈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특이한 것 중 하나는 총구 구멍이 성담 하단으로 나 있다는 점이다. 계곡 쪽으로 총구를 겨누기 위함이라 추정된다.

또한, 주둔소 안에는 당시 토벌대와 민간인들이 잠을 잤던 숙소터도 남아 있다. 토벌을 다니다가 들린 군인들의 임시숙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30여 명 이상이 잘 수 있는 마루방도 있었다. 성 밖 주변에는 돌담으로 두른 작은 초소가 여러 개 산재해 있다. ‘오승국(4·3연구자)의 4·3 유적지 탐방’에 의하면, 시오름 주둔소 성안에는 경찰 1명과 마을 청년 5~6명이 상주하며 교대로 보초를 섰다고 한다. 성안에 있었던 초가에서는 식사를 준비하는 마을 부녀자들이 살았다. 주둔소 보초를 서는 이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수류탄 2개와 일제침략도구로 쓰이기도 했던 구구식총 7자루가 전부였다. 시오름 주둔소에서 가까운 마을인 서호 마을에 토벌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말경이었다. 마을 주변에는 돌로 성을 쌓게 하고, 서호리 부녀자들로 하여금 군인들의 온갖 시중을 들게 하였다.

시오름 찾아가는 날은 지난 밤 내린 비로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소리가 마치 영혼들의 울부짖음과 흐느낌처럼 여기며 가는 길이었다.

시오름 주둔소를 들린 다음 다리를 건너며 그 깊은 계곡의 바위를 살피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시오름 주둔소를 쌓은 돌들 일부를 계곡에서 구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주둔소 이정표 곁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목장지대 잣성길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어쩌면 시오름 주둔소의 적지 않은 성담들은 이곳에서 옮겨졌을 것이다. 그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그곳에는 제주역사문화가 서린 유적이 있었다. 계곡 동쪽은 4·3의 아픔이, 서쪽에는 말을 키웠던 잣성이 있어 주변을 걸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의미가 깊다 하겠다. 지금 이곳은 짙은 녹음이 드리워진 울창한 밀림 지역이지만, 예전에는 나무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한라산 위쪽과 아랫마을을 한 번에 조망할 수 있고 주변을 널리 살펴볼 수 있던 위치였다고 한다.

밀림 속 숨겨진 주둔소를 찾아서 보는 역사문화는 보이지 않은 곳에 숨겨진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리라.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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