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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섬 둘러싸 굳건히 왜구 침입을 막아서다

(135)동해진성과 구산봉수·대포연대

대포 중산간에 설치된 동해진성
한라산 남쪽 방어 군사 요충지
구산봉수, 외적 침입 시 신호
전경 초소, 마을 문화 공간으로

 

▲대포의 방어유적과 마을 유래

이형상 목사가 제주도를 순력할 때 화공 김남길이 그린 『탐라순력도(1702)』의 <한라장촉>을 보면, 대포 지경 중산간지역에 동해진성[동해방호소], 해안지역에 대포연대가 그려져 있다. 동해진성 지척에는 구산봉수도 보인다. 대정현 동쪽을 방어하는 통신 군사시설들이 이 지역에 몰려있어 조선 때 대포 일대는 한라산 남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대포(大浦)의 옛 지명은 ‘큰개’다. 제주에서는 만처럼 바다가 육지로 옴폭 들어온 곳을 ‘개’라고 하고, 반대로 육지가 바다로 뾰족 돌출한 곳을 ‘코지’라 한다. ‘큰개’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大] 개[포구: 浦]’이다. 대포마을의 역사는 큰개 포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선사시대부터 거주했던 흔적들이 있다. ‘오뎅이궤 바위그늘’, ‘선궷내깍 서쪽 대지’, ‘대포해안 바위그늘’ 등에서 무문토기, 적갈색토기, 마제석창, 동물뼈 등, 다양한 선사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존자암 및 법화사의 관문 기능과 동해진성의 군사방어 기능 등을 관련지어 봤을 때, 일찍부터 대포 지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정현 동쪽 지역을 방어했던 동해진성

조선 시대에 제주도를 지키는 방어체계로는 3성 9진 25봉수 38연대가 있었다. 제주목성, 대정현성, 정의현성의 3성에다 외적이 출몰할만한 요충지에 9진을 세웠다. 그리고 제주도를 빙 둘러 가면서 오름에 25개의 봉수, 해안에 38개의 연대를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경계했다.

조선 시대에 대정현 동쪽을 지키는 진성은 동해방호소[東海防護所/동해성]다. 원래 강정에 있었던 가래방호소를 대포 지경으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5년(1510) 9월 16일 기사를 보면, 장림은 제주 목사로 부임하여 방어시설에 대한 느낀 바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대정현의 동해포는 적들의 배가 머물만한 곳으로 의심이 됩니다.”라고 했다. 동해포는 대포동의 ‘선궷내깍(동해천 하구)’ 일대이다. 만입이 깊숙하여 외적이 침입할 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장림은 조정에 “동해포에는 원래부터 성이 없었으므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함경도나 평안도의 예에 따라 성을 쌓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보고했다.

성만 있으면 지키기 어려우므로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4군 6진을 설치하여 삼남 백성을 이주시켜 병농일치제로 지켰듯이 동해성을 축성하고 성 주변에 백성들도 살게 하자는 것이다. 장림 목사는 조정의 허락을 받아 지금의 대포동 368번지 일대에 성을 쌓고 이를 동해성이라고 칭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에는 “동해성은 대정현에 있다. 서․남에 2개의 문이 있고, 성 가운데 샘이 있다. 옛 성이 허물어져서, 목사 성윤문 때 개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에는 “동해성은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00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성 가운데에 샘이 있다. 동해방호소 성안에는 객사와 군기고가 있다. 경오년(1510년)에 가래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동해방호소를 모슬포로 이전하면서 동해진성은 폐쇄되었고, 대정현 동쪽의 방어기능은 위축되고 만다. 현재 동해진성의 흔적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성내에서 식수로 사용했던 샘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 샘물을 ‘동해수(東海水:동수물)’이라 한다. 과거에 동해수를 이용하는 논들이 있기도 했다. 대포 조상들은 이 샘을 동회유천(東廻流泉)이라 칭하며, 대포십경의 하나로 그 절경을 노래했다.

▲동해진성 앞에 있는 구산봉수

구산봉수는 동해진성 바로 코앞에 있다. 하원 지경의 굿산망 정상부에 있고, 동해진성과는 직선거리로 약 400m 정도라 단숨에 달려갈 수 있다. 구산봉수는 동으로 삼매봉수(서귀포시 삼매봉), 서로는 호산봉수(안덕면 월라봉)와 교신했다. 여기에 소속된 병력은 별장 6명에 봉수 12명이었다. 봉수대는 오름 정상부에 흙이나 바위로 타원형의 둑을 쌓고 중앙에 봉화를 올릴 수 있도록 대를 구축하여 외적 침입 시 신호하는 통신감시시설이다. 구산봉수의 원형은 현재 찾아보기 힘들다.

▲해안 방어유적 대포연대

대포의 중산간지역에 동해진성이 있었다면, 해안지역엔 대포연대가 있었다. 대포연대는 동해진성에 소속된 연대로, ‘대포코지’ 서쪽 측면인 대포동 2506번지 일대에 있다. 이곳은 주위보다 밖으로 돌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안과 직접 접한 높이 25m의 벼랑 끝 언덕에 축조되어 있어서 범섬과 송악산 일대까지 시야가 훤하다. 가파도, 마라도까지 한눈에 다가온다. 사방을 경계하기 좋아 연대의 위치로는 최적지이다.

관리 소홀로 연대가 허물어지고 기초석만 남아있었으나, 1996년에 지방기념물 23-12호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 복원되었다.
 

 

▲전투경찰대 초소가 마을의 역사 문화 공간으로

대포동의 군사 전략적 가치는 오늘날에도 입증되고 있다. 국방부는 1960년대부터 대포연대 일대에 전투경찰대 경비초소를 설치하여 해안 경비를 담당케 했다. 초소 건물과 지하 벙를 구축하고 열상감시장비(TOD)까지 갖추어 인근 해양을 24시간 경비하였으나, 지금은 병력이 상주하는 초소 기능은 중지되었다. 대포마을회 고두산 회장의 주도하에 그 기능이 상실된 전경초소 부지를 국방부로부터 매입하여 마을의 역사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대포마을회와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 공동주관으로 이곳에서 ‘2021 대포마을 노지문화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곳에는 2002 월드컵대회 당시 연습장으로 만들어진 대포축구장이 있다. 지금도 타지 축구팀들의 전지훈련장으로 애용되고 있다. 또한, 대포 조상들이 노래한 대포십경 기념비와 대포 바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김순이 시인의 ‘대포해안에서’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으로 제주올레 8코스가 통과하고 있어 올레꾼들의 감동과 사랑을 받는 명소이기도 하다.

글=지리학박사 김오진(질토래비 학술이사)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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