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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쇼팽 벤치에 앉아 잔잔한 야상곡에 젖으면

[유럽 인문학 기행-폴란드] 바르샤바 쇼핑 벤치

“바르샤바 시내에 쇼팽 벤치를 만들도록 합시다. 시민들은 물론 외국 여행객들이 쇼팽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음악 세계를 반추할 수 있는 길이 되게 합시다.”

2009년 3월 13일 폴란드 정부는 ‘쇼팽의 해 2010 축하위원회’를 구성했다. 1810년 태어난 폴란드의 세계적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조직이었다.

 

 

축하위원회는 주요 사업의 하나로 쇼팽 벤치를 추진했다. 쇼팽이 태어난 집에서부터 유해가 묻혀 있는 성당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을 따라가는 길을 연결한 뒤 곳곳에 벤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폴란드 조각가 제르지 포레브스키가 설계한 쇼팽 벤치는 바르샤바에 모두 15개 설치됐다. 쇼팽의 삶, 음악 인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장소들이다. 벤치는 검은색 금속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쇼팽 벤치에 가면 다른 벤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도가 있다. 벤치가 세워진 이유를 영어, 폴란드어로 짧게 설명한 팻말도 붙여 놓았다.

 

벤치에는 작은 버튼이 달려 있다. 이것을 누르면 쇼팽이 작곡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물론 아주 짧게~~. 벤치에는 QR 코드도 설치돼 있다. 휴대폰을 갖다 대면 쇼팽에 대한 정보는 물론 그의 음악을 더 들을 수 있다.

쇼팽 벤치가 설치된 곳은 크라진스키치 광장, 미오도바 거리, 코지아 거리, 바르샤바 음악원, 베셀 궁전, 대통령궁, 사스키 궁전, 사스키 정원, 로마가톨릭성당, 카지미에르조브스키 궁전, 차프스키 궁전, 성십자가교회, 자모이스키 궁전, 프레데릭 쇼팽 박물관, 와지엔키 공원의 프레데릭 쇼팽 동상 앞이다.

몇 년 뒤에는 프레데릭 쇼팽 국제공항에도 쇼팽 벤치를 설치했다. 쇼팽 벤치가 세워진 곳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한 번 둘러보도록 하자.

 

 

프레데릭 쇼팽은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에서 54km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쇼팽이 태어난 집에는 대형 피아노 한 대와 그의 청동 두상, 노란 꽃 한 다발이 놓여 있다. 그가 태어난 집은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근에는 강이 흐른다. 이곳에서는 매년 5~9월 일요일에 쇼팽 음악 콘서트가 열린다.

 

쇼팽은 젤라조바 볼라에서 11km 떨어진 브로초브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가 결혼한 곳이기도 하다.

 

쇼팽이 태어난 지 7개월 됐을 무렵 그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사했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경력을 쌓았다. 친구들도 만났고 사랑도 경험했다.

쇼팽은 바르샤바는 물론 폴란드 곳곳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폴란드 민속음악을 발견하고 공부했다. 그 덕분에 이전에 탄생한 어떤 음악가보다도 더 깊이 폴란드 음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의 수많은 작품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됐다.

쇼팽의 아버지는 중학교였던 바르뱌사 리세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쇼팽은 나중에 이 학교 학생이 됐다. 리세움이 있던 건물은 지금 사스키 궁전으로 바뀌었다. 사스키 궁전에는 공원이 하나 붙어 있는데 바로 사스키 정원이다. 어린 쇼팽은 이곳에서 뛰어놀았다.

 

 

쇼팽 가족은 바르샤바에서 여러 차례 이사했다. 카지미에르조브스키 궁전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기숙학교에 다녔다. 이곳은 지금 바르샤바 대학교 동양학연구소와 예술사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

쇼팽이 가장 좋아했던 곳은 카지미에르조브스키 궁전의 급경사면에 세워진 바르샤바 대학교의 식물원이었다. 이곳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은 여러 식물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상추, 배추, 당근 등도 심어져 있었다. 그는 가끔 저녁 식사에 앞서 간식으로 채소들을 뽑아 먹곤 했다.

쇼팽 가족은 차프스키 궁전에서도 살았다. 지금은 폴란드 미술아카데미로 사용되고 있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마지막 여러 해를 보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신의 방을 갖게 됐다. 쇼팽은 국립극장 공연에 앞서 이곳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쇼팽은 지금은 대통령궁인 라드지빌 궁전에서 여덟 살 때 처음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연을 열었다. 그는 중학생일 때는 인근에 있는 로마가톨릭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크라진스키치 광장에서는 바르샤바 시민들을 모아놓고 야외 콘서트를 열었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으로 알려진 왕립 와지엔키 공원은 쇼팽이 어릴 때 뛰어놀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그의 어린 시절을 기념하는 뜻에서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지금 동상은 복제품이다. 원본은 1926년 만들어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가 파괴해버렸다. 이곳에서는 매년 5~9월 일요일에 야외 콘서트가 열린다.

코지아 거리는 쇼팽이 즐겨 찾던 카페 파니 브르제진스카가 있었던 곳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지금은 없어진 카페 이야기를 가끔 적곤 했다.

쇼팽은 미오도바 거리를 혼자 걸어 다니곤 했다. 거리에 있던 서점이나 음악 가게에 들르기도 했다. 쇼팽이 자주 갔던 식당 ‘호노라트카’는 지금도 남아 있다. 주소는 ‘Miodowa Street 14’이다. 그는 이곳에서 럼주를 넣은 커피를 마시곤 했다. 지금은 바닐라아이스나 알코올음료인 크루프니크를 넣어 먹는 것으로 변형됐다.

지금 검찰 및 대법원 청사로 쓰이는 베셀 궁전은 과거 우체국이었다. 인근에는 마차 정류장이 있었다. 1830년 11월 2일 20세이던 쇼팽은 이곳에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콘서트를 열기 위해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이 바르샤바에서의 마지막 날이고,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모이스키 궁전은 쇼팽의 여동생 이자벨라가 방을 빌려 살던 곳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오빠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물건을 모아 보관했다. 1863년 자모이스키 궁전의 한 방에서 폴란드를 지배하던 프로이센 세력을 몰아내려는 쿠데타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다. 프러시아 병사들은 궁전에 살던 모든 거주자들을 쫓아낸 뒤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그 중에는 이자벨라가 갖고 있던 오빠의 물건들과 쇼팽이 어릴 때 사용했던 피아노도 포함돼 있었다.

 

 

쇼팽 박물관은 그닌스키 궁전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쇼팽과 관련한 많은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또 현대 IT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해 쇼팽의 음악과 생애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바르샤바 구시가지 인근에 있는 성십자가교회에는 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 기둥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다. ‘당신이 보물을 간직하는 곳은 당신의 심장을 찾는 곳이다-프레데릭 쇼팽에게 동료들이’

39세가 된 쇼팽은 파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죽은 뒤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프로이센이 폴란드의 영웅인 그가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동생 루드비카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으면 심장을 꺼내 고향으로 보내도록 하렴. 시신은 돌아가지 못해도 내 심장만은 고향을 볼 수 있게 해 주면 고맙겠구나.”

쇼팽의 유언에 따라 루드비카는 오빠의 심장을 알코올이 든 병에 넣었다. 그리고 프로이센 병사들이 찾아낼 수 없게 여자들이 치마를 불룩하게 보이도록 입는 크리놀린 안에 병을 숨겨 몰래 바르샤바로 보냈다. 많은 고난과 우여곡절 끝에 쇼팽의 심장은 성십자가교회로 가게 됐다. 신부들은 그의 심장을 기둥 안에 몰래 숨겨두었다. 그 기둥이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전설로 전할 뿐이다.

 

 

쇼팽의 부모와 세 누이는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옛 포바즈키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음악선생 보이치에크 지브니와 조제프 엘스너, 그의 친구 몇몇도 그곳에 묻혔다. 하지만 쇼팽의 시신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파리에 공동묘지에 영면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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