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교복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주말이면 교복을 벗고 시내로 나가려고 잔뜩 멋을 부린 아이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속내가 궁금해 관심 있게 지켜보곤 했었다. 전주에서 활동하는 다섯 명의 작가가 쓴 청소년 단편집 <너의 여름이 되어 줄게>를 통해 무표정과 환한 얼굴 속에 감춰진 아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만날 수 있었다. 작품 속의 아이들은 엄마 핸드폰으로 게임 무기를 산 뒤 그 돈을 갚기 위해 알바를 하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 만날 지각하고 유학 간다는 거짓말을 꾸며댄다. 자신에게 모든 걸 건 엄마를 놓을 수 없어 다가오는 사랑을 외면하고, 자신도 따돌림당할까 봐 친구의 어려움을 애써 모른 척한다. 그리고 한 번의 시험 실패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퇴를 고민한다. 이런 것들은 지금 이 땅에 사는 청소년들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겪고 고민해온 문제겠지만 절대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기본적인 시급조차 지켜지지 않는 청소년 노동문제나, 불투명한 미래를 두고 꿈과 희망을 찾지 못해 쳇바퀴 돌 듯 시간을 죽이는 아이들이 있다.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랑이
그가 사망하기 2년 전 자신이 대단한 화가로 소개되는 전시회에도 심지어 그 앞을 지나는 기회가 있어도 한번도 들여다 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모든 사물을 원, 원통, 원추로 환원해여 돤다든가 자유로운 시점의 이동으로 피카소나 브락크에게 입체주의를 탄생시키고 전 세계의 화가들에게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부담을 준 장본인, 모딜리아니에게 마저도 사물을 대하고 그릴 때 입체적으로 안보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망상을 하게 만들었다. 비교적 그 사람들보다 더 현대적이어서 팝아트의 대표주자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앤디 워홀마저도 매료시킨 위대한 화가가 그렇게도 생전에 혼자만의 주장을 하며 “세잔은 위대한 화가다”라며 자신의 앵무새까지도 훈련시켜 악쓰게 하고 자기의 전속 비평가라고 했던 세잔의 염원은 이루어진 것이다. 신문에 난 남편의을 보며 너무나 벅차오르는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우당탕 뛰어 들어와 당신 이제 유명해졌다고 외치는 아내의 행동을 바라보며 “당연한 일“이라고 무심하게 대응하던 그도 1906년 67세인 세잔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큰 비를 만나 병을 얻은 뒤 영영 세상을 떠나는 순직을 했다. 신문에 난 세잔을 보는 아내는 얼마나 기뻤을까? 세잔의 여
마한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경기·충청·전라지역에 해당되는데, 각 지역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문화적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에 따라서 마한 영역의 축소를 의미하며, 결국 점진적으로 마한 정치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정치적 변혁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물질문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충청지역 즉 호서지역에서는 마한의 보편적인 분구묘와 계통이 다른 주구토광묘가 축조되고 있어 호남지역의 마한문화와 다른 문화적 양상을 띠고 있다. 호서지역의 보령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분구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 유적으로서 학사적인 의미가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종류들이 송국리형 토기,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간에 상호 관련성을 가지며, 그 시기를 기원전 3〜2세기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 대부분 연구자들은 관창리유적의 주구에서 발견된 송국리 토기에 대해서 교란되었을 것이란 견해에서 그 시기를 3세기를 넘지 않
나주 복암리 3호분이 영산강유역의 분구묘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이유는 하나의 분구 내에 400여년 정도 지속적으로 매장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매장부의 유형 변화를 통해 마한의 정치와 사회문화를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대형분구 축조 이전의 3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에 이르는 선행기에는 난형(卵形) 몸통의 목이 좁은 형태에서 U자형 대형옹관으로 변화된 옹관이 주요 매장부로 채용되고 있다. 이 시기는 영산강유역의 연맹체 세력들이 백제의 영향력에 압박을 받으면서 새롭게 결집·성장하는 단계로 파악할 수 있다. Ⅰ기는 5세기 후엽에서 6세기 전엽에 해당하는데, 선행기의 분구를 조정·확대하여 방대형 분구를 축조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새로이 출현하는 96석실은 공주지역의 백제 석실분과는 입지, 평면형태, 축조방법과 구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일본 구주지역과 교섭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위 영산강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실 내에 시기차를 두고 안치된 4기의 옹관의 존재는 전통적인 옹관과 외래의 석실이 결합된 양상으로서, 이는 옹관을 주요 매장시설로 이용하던 마한세력이 석실분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예술은 감성을 통해 불특정 이성에 대항할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술을 통해 차오르는 기대와 감흥, 희망을 얻으며 세상의 이치를 순탄하게 순종시키려는 의지를 담는다. 누구나 감성에 의해 마음은 좌우된다. 때론 흥겨운 음악을 들으며 기세를 높이기도 하며 감미로운 선율로 자신을 위로받기도 한다. 조물주는 태초에 세상 모든 만물을 같게 짓지 않았다. 고로 인간은 같음을 노력하지만, 이해의 인식 부족과 성찰의 미흡으로 많은 실망과 괴로움을 받는다. 그래서 세상 누구나 한 번쯤은 감정에 상처받고 아파하며 의지와 다르게 마음 한편 날카로운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방법으로 인간은 예술을 선택하였고 그러한 예술을 통해 느끼며 함께 공유했다. 예술의 경험은 아픔에 충분한 해답으로 다가서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나오지 못한 감성은 마음의 상처로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글귀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용어는 아니다. 포용적인 음의 길이를 나타냄도 아니며 창법의 기교를 멋지게 구성하고자 하는 표현도 아니지만, 거부감을 동반한 국문학적 보편성과 융통성의 회유가 실마리를 쥔 고민의 잣대로 다가서기
나주 복암리 3호분은 몇 년전에 KBS의 역사관련 다큐프로그램에서 “아파트형 고분”으로 소개되어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그것은 하나의 분구(墳丘) 내에 41기의 매장(埋葬)시설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중층 구조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잘 묘사한 제목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복암리 3호분은 마한 분구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마한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곧 혈연을 기반으로 하나의 분구 내에 무려 300〜400년의 시간 폭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매장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장부의 구조가 변하고 있는 점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마한의 정치 사회문화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서 가히 ‘마한역사 기록관’ 또는 ‘마한 박물관’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이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주변의 경지정리가 되기 이전에는 7기가 자리잡고 있어서 七造山이라 불렸으나 경지정리 과정에서 3기는 훼손되고 현재는 4기만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대형 분구묘가 저평한 구릉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어서 마치 산으로 보였던 것으로 이를 인위적으로 조성된 산이라는 의미에서 조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2022년의 임인년 호랑이해가 밝았다. 나라 안팎으로 코로나19라는 몹쓸 전염병이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지만, 우리 민족은 지난 승리의 역사 한 모습처럼 굳건하게 서로를 위로하며 위기를 잘 이겨내고 있다. 역사의 흐름과 교훈은 항상 반복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돌아보며 지난날의 과오와 교훈을 얻고 보다 나은 생활과 안정된 현실을 꿈꿔왔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견제, 억압과 탄압, 갖은 병마에도 언제나 우리 민족은 마음을 함께 모았으며 우리 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인 아들, 딸들의 낙원을 위해 노력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했다.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고 쓰러진 서로를 안고 고통스럽게 아파할 때도 있었다. 순간마다 우리에게 다가온 목소리 "이겨낼 수 있어", "우리는 하나", "우린 할 수 있어", "우리니까". 역사는 또 흐르고 시대는 다시 반복한다. 모진 삶의 현실과 몹쓸 전염병은 총, 칼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고 또 다른 삶의 변종 회오리는 불안과 초조를 낳고 있지만, 과거 우리 민족이 그랬듯이 우리는 서로를 위하고 뜻을 함께하며 저마다 의지를 다질 것이다. 힘든 현실과 어려운 정국政局, 병마가 휘도는 세상 속 우리가 원하는
인류는 생존과 편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왔을 것으로, 그들이 남겨놓은 유적의 주변 환경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생활의 터전인 집자리는 우선적으로 자연의 재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선택하여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죽음의 공간에 해당하는 분묘를 축조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를 선택하지만, 그 집단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전통이나 사상 등이 반영되는 지리적 선택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다양한 종류의 유적들은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형성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며, 이를 유적 경관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유적 경관은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부안 백산성 역시 이러한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백산성의 주변은 내륙에서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해당하고, 남북으로는 고부천과 동진강이 감싸고 흘러 서해로 통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유적 경관의 관점에서 보면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매우 적합한 위치에 해당한다. 또한 이곳의 수로교통과 관련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안현 산천조에 주목되는 기사가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왕과 왕비가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은 삼국시대의 고고유물 가운데 최고의 위세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지역에서는 이러한 금동관이 당시 왕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에서, 그것도 왕릉이 아닌 분묘에서 그 출토예가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화성 요리 목곽묘, 천안 용원리 석곽묘, 공주 수촌리 목곽묘, 서산 부장리 분구묘, 익산 입점리 석실분, 고흥 길두리 석실분, 나주 신촌리 분구묘 등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백제지역에서 금동관이 출토되는 분묘 양상은 익산 입점리를 제외하면 중앙 지배세력의 묘제와 다른 다양한 유형의 분묘라는 점에서 각 지역별로 분묘 전통이 다른 토착세력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금동관이 출토된 분묘들은 한성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이어서 당시의 백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은 한 변이 35×30m, 높이 5.5m의 방대형 분구묘로서 분구 내에 상·하 이중으로 12기의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부로 안치하고 있다. 그 중 을관(乙棺)에서는 한국 최초로 고대국가의 금동관이 부식되지 않고 거의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한편 1999년 국립문
불확실한 사색들을 인간의 신체를 빌어 기록하고 있다. 몸의 추억에 대한 기록이자 생리적 실존에 기초한 명상들을 재조립해서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 의식의 경계를 넘어 무의식으로 관자를 인도하는 그의 회화는 우리가 겪게 되는 불편한 감정들의 경계를 희미하게 지우면서 제3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 해설=문리(미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미술가 약력: 정복수는 1979년 청년작가회관에서 첫 개인전 <바닥畵-밟아주세요>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4회 여회 개인전과 한국미술 -인간 동물 기계전,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기고 desk@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