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경인일보) [인천항 평택항-황해를 넘어 세계로]오늘이 있기까지

인천항, 민족 희로애락 함께한 '전통항구'…대중국 교역 순풍 타고 괄목상대
평택항, 외환위기 딛고 태어난 '젊은항구'…'인천항 그림자' 지우고 독자성장

[인천항 평택항-황해를 넘어 세계로]오늘이 있기까지|인천항

 

 

 

백제·고려 해상교역 관문… 조선 '해금정책' 침체
일제강점기 무역항 기능 강화 '조수간만의 차' 극복
인천상륙작전때 파괴… 5개년 계획으로 피해 복구
한중수교후 급성장… 남·북·신항 개발 '기능' 확장

 

2020121401000600000030345

한반도와 중국에 둘러싸인 황해와 맞닿아 있는 인천은 과거부터 '해양 교역도시' 역할을 해왔다. 백제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때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이용한 해상교통로는 인천에서 출발해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둥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登州航路)'였다.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펼친 고려시대에 인천은 개경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꾸준히 발전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침체기에 들어갔다.

조선이 황해의 해상교통을 전면 금지하는 등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펼쳤기 때문이다.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발전했던 항구와 포구는 기능을 상실했고, 인천은 한동안 한적한 어촌 도시에 머물렀다.

인천은 개항이 이뤄지면서 해양 교역도시로 다시 주목받게 됐다. 인천은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한다. 일본의 조선 장악과 대륙 진출을 위한 강제적 개항이었다. 인천항은 일본의 조선 지배 전진기지로 사용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국제 무역항 기능을 강화한다.

 

 

인천항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 썰물 때 대형 선박의 접안이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였던 1918년 최대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dock)가 만들어지면서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게 됐다.

인천항은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수입항 기능이 활성화했다. 인천항이 한국 총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46년 94%, 1948년 85.4%, 1949년 88%로 수도 서울의 관문 도시이자 다양한 산업물자의 조달항 기능을 수행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인천항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인 인천항은 항만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중앙정부가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원조물자 등이 대부분 부산항을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천항은 이때 국내 제1항의 위치를 부산항에 넘겨주게 된다. 인천항은 1955~1959년 항만사업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한국전쟁으로 파괴·방치된 시설을 복구했다.
 

 

교역 시장이 확대되고, 운송수단이 다변화하는 산업화 시대는 인천항 발달의 계기가 됐다. 정부가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정책 중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인천항에 대한 투자도 증가했다.

1974년 제2선거가 완공되면서 최대 5만t급 선박을 내항에 수용할 수 있게 됐고, 한진과 대한통운의 민간 자본을 유치해 우리나라 최초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내항 4부두에 조성했다. 이후에도 하역 설비 보강 등 새로운 항만시설을 구축해나가면서 꾸준히 성장했다.

 

 

 

1992년 한중수교는 인천항 무역 환경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한중 양국의 교역은 수교 이후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한국의 대중 수출은 1992~2001년 동안 연평균 24% 성장했는데, 한국 총수출의 연평균 증가율(약 7.8%)보다 3배 이상 높았다.

역사적으로 대중국 교류의 중심 역할을 해 온 인천도 수교 직후 중국에 대한 수출이 200% 이상 증가했고, 매년 두 자릿수의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다. 중국은 1993년부터 인천항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인천항은 기존 내항 중심에서 남항, 북항, 신항 등 외항으로 부두시설을 개발하면서 항만 기능을 확장하고 있다. 한중카페리 10개 노선과 53개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다양한 컨테이너·벌크 화물이 인천항을 거쳐 수출·입되고 있다.

 


[인천항 평택항-황해를 넘어 세계로]오늘이 있기까지|평택항

 

 

1980년대 말 서해안 주목 받으면서 본격 개발 추진
개발초기 '대체항' 여겨져 화물분담 수동적 역할만
IMF 사태 위기… 지자체 노력으로 '국가사업' 전환
단순한 물류취급 넘어 산업·배후 지역과 연계 모색


경기도 유일 국제교통(물류)시설인 평택·당진항(이하 평택항)은 수출 중심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평택항 개발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전까지는 수도권과 경부선 축을 중심으로 한 내륙 위주의 국토 개발이 주를 이뤘다면 이 시기부터는 무역 거점으로 평택항을 비롯한 서해안 지역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한중수교로 평택항 개발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중국과의 지리적 접근성을 바탕으로 한중간 교두보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막중한 역할이 부여된 것이다.

균형 발전 측면에서도 석유화학, 자동차 등 일부 지역에 편중된 국내 제조산업의 기능과 수도권에 과밀한 인구를 분산하는 등의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평택항은 1986년 12월5일 항만법 시행령에 의해 무역항으로 개항됐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평택항의 부두 시설이라곤 유류를 취급하는 '돌핀 부두'가 전부였다. 일반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항만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호안(침식 방지 구조물), 안벽 축조 등 항만 기초 공사를 다졌고, 1997년 동부두 외항 일반 부두 4개 선석이 준공되면서 무역항의 모습을 갖췄다.

개발 초기 평택항은 근거리에 위치한 인천항의 '대체 항' 정도로 여겨졌다. 공업항으로서 인천항을 통해 드나드는 수도권 화물을 분담하는 다소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1995년 평택항 종합개발 기본계획에 따라 추진된 평택항 개발은 항의 외연을 확대해 나가는 역사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인천항의 대체 항에서 독자적인 공업항으로, 다시 배후 지역과의 연계 등을 꾀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업항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다. 특히 1997년 IMF(금융위기) 사태 당시 평택항은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평택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던 시기와 IMF 사태가 맞물리면서 재원 부족 문제가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특히 62선석으로 계획된 개발 규모 가운데 민간투자 방식으로 진행된 절반 이상이 사업 자체를 포기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평택항 개발이 무산될 수 있던 상황을 반전시킨 건 지자체의 노력이었다.

민자로 이뤄지던 선석 개발을 국가 재정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평택시는 당시 건설교통부와 해양수산부 등 관련 부처에 수차례 건의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단 위기에 몰렸던 평택항 개발이 재추진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개발의 원동력을 다시 확보한 평택항은 이후 급격한 성장을 이뤄내게 된다. 이 기간 평택항은 컨테이너 항로를 개설하고, 카페리선 취항과 국제여객터미널 건설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현재 평택항을 대표하는 자동차 전용부두가 생겼고, 배후단지를 개발함으로써 단순히 물류를 취급하는 항만을 넘어 산업간 연계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업항으로 발돋움했다. 현재 평택항은 총 64개 선석(평택지구 34, 당진지구 30)을 운영하고 있다.

오는 2040년까지 81개로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운영 항로는 컨테이너 정기선 13개, 카페리 5개 노선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을 넘어 동남아 시장 개척에 주력하고 있다. 신국제여객터미널과 추가 배후단지 개발 등을 통해 인프라 확장에도 힘쓰고 있다.

/기획취재팀 

 

 

※기획취재팀

글 : 최규원차장, 배재흥, 김태양기자

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

편집 : 박준영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