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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민족 동질성의 키워드, 마니산 참성단 [강화 속 고려를 찾아서·(29)]
단일민족이라는 말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 민족 동질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우는 인물이 단군이다. 그 단군과 관련한 국내 대표 유적을 꼽으라면 단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고려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 강화도호부의 ‘고려 마리산(摩利山)’ 대목에서 “꼭대기에 참성단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朝鮮 檀君)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마니산 이름 앞에 ‘고려(高麗)’를 붙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강화도호부 마니산(摩尼山) 참성단을 설명하면서 ‘세종실록지리지’의 단군 제사 이야기와 함께 ‘본조(本朝)에서 전조(前朝)의 하던 그대로 이 단에서 하늘(星)에 제사했다’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고려시대에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했다는 얘기다. 단군이 시작한 참성단 제천행사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인데, 이 의식은 요즘에도 행해지고 있다. 매년 10월3일 개천절이면 개천대제와 전국체육대회 성화 채화 행사가 마니산 참성단에서 펼쳐진다. 강화도 하면 마니산이고, 마니산 하면 참성단이다. 마니산 없는 강화를 떠올릴 수 없고, 참성단 없는 마니산을 생각할 수 없다. 그 마니산과 참성단은 국가대표 유적이면서 강화의 볼거리 1번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특히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강도시기에 마니산과 참성단은 무척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졌다. 이때 마니산 남쪽에 이궁(離宮)을 새로 지었고, 왕은 참성단에서 제를 올리기도 했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1259년 2월에 마니산 남쪽에 이궁을 창건했다고 돼 있다. 당시 관리였던 교서랑(校書郞) 경유(景瑜)의 얘기에 따른 것이었다. 1264년 5월에는 삼랑성 신니동에 가궐을 세웠다. 이는 중랑장 백승현의 말을 따른 것이었는데, 백승현은 이때 참성단에 제사 지낼 것도 함께 건의했다. 가궐을 새로 건축할 정도였으니 왕이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임은 따로 확인할 필요조차 없이 뻔한 일이다. 1270년 강화에서 개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뒤에도 강화의 마니산과 참성단은 제천(祭天)과 순례의 상징 장소로 그대로 기능했다. 특히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칠 때 참성단은 민족성을 강조하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되어 주었다. 고려 후기 유명 문인들이 마니산과 참성단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국토를 바라보며 읊은 노래가 아직도 전한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마니산과 참성단 시편이 여럿 남아 있다. 말년에 참성단을 찾은 목은은 ‘단군이 남긴 발자취는 이 단 위에 머물러 있다’면서 늙은 몸이 앞으로 몇 차례나 더 돌아볼 수 있겠느냐는 심경을 풀어내기도 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도 참성단에 올라 목은 이색의 참성단 시를 되뇌는 노래를 읊었다. 참성단 제천행사가 고려와 조선을 이어 전승되었듯이 참성단 등반 시 또한 왕조와 200년 세월을 뛰어넘어 문인들의 마음을 연결해 주었다. 마니산과 참성단은 개성에 살던 목은 이색의 경우처럼 강화와 개성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다. 해방 직후까지도 그랬다. 당시 개성의 학생들이 배를 타고 강화까지 수학여행을 오고는 했는데, 마니산과 참성단이 필수 코스였다. 그 연결이 끊긴 지 어느덧 80년이 다 되었다. 개성과 강화, 고려의 수도 두 곳이 마니산과 참성단으로 다시 연결될 날은 언제일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