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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22> 목포문학관

“목포는 문학이다” 차범석, 박화성, 김우진, 김현 '문학혼' 곳곳에
차범석
사실주의 연극 완성 극작가
‘제작극회’ 창단, 대표작 ‘산불’
박화성
한국 최초 여성 소설가
1923년 첫 단편 ‘팔삭동’ 발표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은 고전적인 명제가 된 지 오래다. 이 명제와 함께 함께 떠올려볼 수 있는 명제가 있다. 그것은 “목포는 문학이다”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연극에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 여성 소설가 최초 장편을 집필한 박화성,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한 극작가 차범석, 평론 분야의 독보적인 위치를 개척한 평론가 김현이 바로 목포 출신이다. 이들은 목포가 낳거나 기른, 가장 목포다운 문학을 견지했던, 남도의 정서와 감성을 의미있게 구현했던 문인들이다.
 

목포문학관은 갓바위 문화의 거리에 있다. 지난 2007년 10월 9일 개관한 2층 건물로 국내 최초의 4인 복합문학관이다. 1층 박화성관과 차범석관, 2층 김우진관, 김현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교육과 문화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낭독극장, 문예대학, 어린이문학교실, 소설 창작 특강 등을 운영하고 있다. 가을 목포문학제 때는 시화전을 비롯해 편지 쓰기, 문학체험, 문학콘서트, 목포 문학 답사 등도 진행한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1층 차범석관이 눈에 띈다.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완성자라는 수식어답게 연극과 관련된 그의 생애사를 촘촘히 담아내고 있다. 창작의 고뇌가 느껴지는 육필원고, 대본, 공연 포스터, 팜플렛 등의 자료가 비치돼 있다.

차범석에게 목포는 ‘사실적’이다. 목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현장이자, 전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사실주의라는 그물망 안에 무수히 많은 인간군상을 오롯이 담아냈다.
 

차범석은 1924년 11월 15일 죽교동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과 광주사범학교를 거쳐 1966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밀주’가 가작, 이듬해 ‘귀향’이 당선돼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제작극회’를 창단해, 우리나라 최초로 소극장 연극 운동을 시작한다. 그 무렵 그는 일생의 대작 희곡 ‘산불’을 탈고하기에 이른다.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산불’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아울러 연극을 위한 삶을 지향하고자 극단 ‘산하’를 꾸리게 된다.

차범석을 떠올리면 인생은 한편의 연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연극에 매진했던 그의 삶은 한 편의 연극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 여정에서 목포는 영원히 회귀해야 할 본향의 무대였다.

 

 

죽동에서 태어난 박화성(1903~1988)은 한국여류문인협회 초대회장을 비롯해 국제펜클럽 세계연차대회 한국대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목포 정명여학교와 서울 숙명여고보를 졸업했으며 일본여자대학 영문학부를 수료했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최초’라는 수식어에 방점이 놓여 있다. 한국문단에서 소설만 쓴 본격적인 여성작가, 한국 최초 여성 소설가라는 타이틀은 현대문학을 업으로 삼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로 수렴된다.

박화성은 1923년 최초 단편 ‘팔삭동’을 ‘자유예원’에 발표하고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했다. 1932년 여성으로는 첫 장편‘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장편작가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이후 ‘홍수전후’, ‘고향 없는 사람들’, ‘북극의 여명’ 같은 작품 을 발표했으며 리얼리즘에 입각해 도시빈민과 농민들의 참상을 핍진하게 그렸다.

그러나 박화성이 여류작가로, 한 사람의 작가로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에는 적잖은 난관이 있었다. 아내와 육아, 가사 등 각기 다른 의무는 창작에 매진하는 데 적잖은 장애물이었을 터다. 한 사람 작가로 산다는 것은 여타 사소한 것을 밀쳐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전시실에 비치된 손때 묻은 가재도구며 유품은 그녀의 천품을 보는 것처럼 정겹고 소박하다.

2층 김우진관에 들어서면 한 천재작가의 요절이라는 생각과 마주한다. 세상에 자신을 맞출 수 없었던 여린 문학가의 심리를 엿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우진(1897~1926)은 전남 장성에서 당시 군수였던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세 때 무안 감리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목포 북교동으로 이사했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구마모또 농업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의 작품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천착한 결실이다. 당대 어설픈 계몽주의와 감상주의가 문단에 유행처럼 번졌지만, 그는 오롯이 표현주의를 실험한 선구적인 극작가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삶과 문학에의 포부는 부친과의 갈등으로 작용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사카에 머물던 윤심덕으로부터 자살하겠다는 전보가 날아든다. 김우진은 ‘그녀를 말리러 가겠다’고 길을 나서게 된다. 그리고 1926년 8월 4일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에 유서를 남기고 두 사람은 바다로 투신한다.

2층 오른쪽에는 김현관이 있다. 한국평론의 독보적 위치를 점했던 평론가 김현(1942~1990). 그는 240여 편에 달하는 평론과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문태고에 진학한 김현은 이후 서울 경복고로 전학해 둘째 형과 생활하게 된다.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해서는 당시 김승옥, 김치수를 만나게 되고 이후 소설 동인지 ‘산문시대’를 간행하며 문단활동을 펼친다. 그러나 내면에는 목포에 대한 단상이 깊고 아련하게 드리워져 있다.

“선창에 나가 서너 시간씩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옻나무와 발목까지 빠지던 펄의 감촉이 맨 처음 되살아나오고, 가도가도끝이 없던 여름날의 황톳길의 더위와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가 나를 가득 채운다.” (김현, 「두꺼운 삶과 얇은 삶」, 1978, 9)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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