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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기마전투술·세형동검 무장한 한국인 선조 한반도서 야요이인<일본인 선조> 몰아내

 

 

한국인 선조 예맥계·숙신계 경기·강원 거쳐 일본인 선조 정복·동화
고대 일본어 흔적 백제보다 지리적 폐쇄 신라·가야에 더 많이 남아
2~3세기경 백제·가야인 일부 일본열도 재이주 지도층 되었을 것


기원전 7세기 초-기원후 3세기경 동안 약 1,000년간 흉노와 오손, 선비·오환(鮮卑·烏桓) 등 투르계와 몽골계 부족들로부터 기마전투기술을 습득하고 세형동검(細型銅劍)으로 무장한 남시베리아-북만주 기원 한국인의 선조 예맥계(濊貊係)와 숙신계(말갈계)가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 그곳에 살던 청동기, 벼농사 중심 일본인의 선조 야요이인(彌生人)을 정복했다. 야요이인 일부는 동화되고 나머지 수만~수십만명은 수백년간에 걸쳐 일본열도로 이주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한 야요이인은 토착 조몽인(繩文人)을 정복, 통합해 1세기까지는 남부 큐슈와 오키나와, 7세기까지는 도쿄 지역까지 야요이화했다.

# 위만조선의 멸망 그후

러시아 출신 미국 언어·문헌학자 보빈(Alexander Vovin)에 의하면 기원전 7세기 초-기원후 3세기경 흉노와 선비·오환 등 유목민족들로부터 기마전투기술을 습득하고 선진 세형동검으로 무장한 남시베리아-북만주 기원 한국인 선조가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 그곳에 살던 일본인 선조 야요이인을 정복, 동화시켰다고 한다. '총·균·쇠(Guns, Germs, and Steel)'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도 보빈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다이아몬드는 한국인과 일본인 DNA 검사 결과를 인용해 보빈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의 (고)조선 침공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조선 성립과 준왕(準王) 세력의 남하 △기원전 2세기말 위만조선이 멸망한 것도 랴오허다링허 유역에 거주하던 맥계인(貊係人) 등이 한반도 방면으로 대거 남하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 선조는 경기도와 강원(춘천, 원주) 일부→충청→전라→경북→경남 순서로 한반도 중남부의 야요이인을 정복, 동화시켰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특정 시점 한반도 서남부 마한(馬韓)과 한반도 동남부 진·변한(辰·弁韓) 언어가 서로 다르다 했던 것은 이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 일본어 야요이어의 흔적은 평야지대 백제보다는 산악지대로 북방 기마군단에 좀 더 장기간 버틸 수 있었던 지리적으로 폐쇄적인 신라(경북)나 가야(경남) 지역에 더 많이 남아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일본어와 유사하게 들리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모'(고대 일본어로 어머니를 의미, 전북 남원) △'토라'(고대 일본어로 호랑이를 의미, 상주 모동·모서) △'투라미티'(고대 일본어로 앞+도로, 경주 인근) 등의 지명과 '지지(더럽다는 뜻)', '우에(上)' 등의 표현이 여전히 한국어(사투리)에 남아 있다. 신라 경덕왕 재위기(742~765년) 한자음으로 바꾸기 이전 지명에는 고대 일본어(야요이어)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야요이인 일부는 한국인 선조에 의해 정복, 동화되고, 나머지 수만~수십만명은 수백년간에 걸쳐 차례로 일본열도로 이주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한 야요이인들은 1세기까지는 남부 큐슈와 오키나와, 7세기까지는 도쿄 근처까지 야요이화했다. 야요이문화가 토착 조몽문화(繩文文化)를 대체해 나갔다.

#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한편 조예의 위(魏)와 손권의 오(吳)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던 고구려는 사마의가 지휘한 4만 위군(魏軍)에 의해 랴오둥 공손씨의 연(燕)이 멸망당한 4년 뒤인 242년, 위나라 땅이 된 랴오둥 요충지 서안평을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고구려의 선공에 자극받은 위나라 관구검

( 丘儉)은 선비·오환족이 포함된 2만 연합군을 이끌고 244년과 245년 잇달아 고구려를 침공했다. 서전(緖戰)에서 승리하여 위나라 연합군을 얕잡아 보게 된 고구려 동천왕은 5,000기를 직접 지휘해 방진(方陣)을 친 연합군을 공격했으나 병력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위나라 연합군은 동천왕 부대를 구원하러 온 재상 명림어수의 대군까지 섬멸했다. 위나라군은 기세를 타고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점령했으며,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두만강 유역 북옥저(北沃沮)로 도망한 동천왕을 추격했다. 관구검은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복속돼 있던 동해안의 동예도 공격게 했다. 백제 고이왕은 낙랑이 동예를 공격하는 틈을 타 낙랑을 습격했다. 동천왕은 246년 밀우·뉴유의 기책(奇策)으로 겨우 왕기의 위군(魏軍)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 따르면 위나라 연합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낙랑을 통해 퇴각했다(遂自浪而退)' 한다. 위군이 침공로를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먼 남쪽 길을 돌아 퇴각했다는 뜻이 된다. 고구려를 멸망시킬 생각을 가진 위나라가 고구려 서남쪽 낙랑군을 고구려 공격을 위한 발진(發進) 기지로 이용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고구려의 중심지 랴오닝성 동남부(환도성)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서쪽 랴오허 유역뿐만 아니라 남쪽 대동강 유역에서도 발진해 협공을 가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8년 사마의의 랴오둥 공손씨 연(燕)나라 공략과 244년, 245년 2차례에 걸친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은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큐슈와 혼슈를 포함한 일본 열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열도에서도 정치체제가 태동했다. 히미코(卑彌呼) 여왕의 야마타이국은 사마의가 랴오둥을 침공한 238년, 유주(幽州)의 속군(屬郡) 대방(황해도로 추정)에 사신을 파견했다. 북큐슈 야마타이를 중심으로 야마토국(大倭國)이 발전해 나갔다(야마토국의 중심이 혼슈섬 기나이라는 설도 있다).

# 한반도 최후의 야요이인

보빈에 의하면, 남부시베리아-북만주로부터 남하한 한반도인(백제인, 가야인) 일부가 2~3세기경 일본 열도로 재이주해 신공(진구) 황후, 응신(오진) 천황 등의 선조가 됐다 한다. 그에 의하면 '진구'(2~3세기)나 '오진'(3~4세기)은 고대 일본어(야요이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라 한다. 한반도 출신 2차 도래인들은 북큐슈나 혼슈섬 기나이(畿內) 일대에 이미 정착해 있던 야요이인을 제압하고 일본 열도 지도층이 됐을 것이나 11세기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인이 나중에 영국화 됐듯이 소수였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화 됐을 것이라 한다. 보빈에 의하면 금관가야인은(대가야인도) 한반도 내 최후의 야요이어 사용자들이었을 것이라 한다. 400년 광개토대왕 재위기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왜(倭)로 표현된 야요이어 세력이 한반도에서 거의 소멸됐을 것으로 본다.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아화왕(阿華王)의 항복을 받았으며, 400년 신라의 간청을 받아들여 5만 대군을 파병, 백제가 부추긴 금관가야와 왜 연합세력의 경주 점령을 해소한 다음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고구려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은 △충주 고구려비 기록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왕 청동호우 △문경·영주·의성·울산 등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적석총 등의 사례에서 증명된다.

# 백제문화 영향 받은 고대 일본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백제와 신라, 금관가야 등 한반도 남부세력이 약해지자 낙동강 중류 고령 중심의 대가야(반파국)와 함께 왜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 졌다. 고구려는 모용선비 잔여세력인 북연(北燕)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404년 황해도(대방 지역)까지 쳐들어 온 왜와 백제 세력을 몰아냈다. 담양, 영광, 함평, 나주, 광주(光州), 영암, 해남을 포함한 전라도 일대에는 4~6세기경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왜식묘제(倭式墓制)로 '앞부분은 각지고 뒷부분은 둥근' 형태의 왕릉급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이 대거 존재한다. 나주 반남면 일대에는 백제 왕릉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옹관고분들도 다수 보인다. 5~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나주 다시면 영동리 대형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 DNA는 조사 결과 북큐슈의 현대 일본인 DNA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5-6세기경 영산강 유역은 백제가 아니라 야요이인들이 건너가 정착한 북큐슈 왜 세력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가 중국 남조(南朝)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해류 흐름으로 보아 선단(船團) 중간 기착지로 영산강 유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대 일본은 백제(구다라)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고대 일본 귀족들이 백제 귀족성(貴族姓) 진모, 귀실, 흑치, 사택(사타), 고이, 재증과 같이 2음절로 가문 명칭(姓)을 정할 정도였다. 상당 기간 왜세력(倭勢力)의 지배를 받던 영산강 유역은 백제 동성왕(재위 479~501년)과 무령왕(재위 501~523년) 시기 백제에 완전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나주 다시면 복암리 고분 출토 금동신발에서 6세기 초 백제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