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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7) 서정성 높은 동양적 휴머니즘의 시인, 최학규

시인은 국권침탈이 일어났던 1910년, 전북 김제시 청하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정읍농업학교 재학시절 조선일보 학생문예에 시가 당선된 바 있다. 시인의 일기문에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문학적 재질로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음을 보여준다. 1929년 정읍농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신병 때문에 곧 귀국하였다. 그 후 도내 중학교에서 15년 남짓 교직 생활을 하였으며, 시인의 나이 54세 되던 해인 1963년에는 『현대문학』에 시 「나의 문」을 발표했고, 1964년 「꽃」이 추천되면서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시인은 50대 중반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절실했다. 당시 익산에는 “남풍”이라는 시 동인회가 있었는데, 시인은 이 동인회에서 좌장을 맡기도 했다. 대부분 현직교사인 그들은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한 사람도 빠지지도 않고 모두 나와 활발하게 시와 문학을 논의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자기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식탁엔 아침부터 메뉴에도 없는 피곤이 오르고, 그대와 나 말없이 담배만 피우며 끄며”

얼핏 보면 일상에 지친 나른한 모습들이었지만, 그들의 시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그들은 당시 아름다운 토속어가 많이 죽어버린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자고 다짐하곤 했다.

시인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킨 향토 시인으로 “동양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정의 농도를 짙게 풀어 쓴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시인이 태어난 곳, 청하는 김제, 군산, 익산과도 가까운 곳이어서 시인은 이 세 지역을 활발하게 오가면서 문학인들과 교류하였으며, ‘청송(靑松) 같은 의지’로 작품을 쓰는데 열정을 다하였다. 만년에는 김제 청하를 떠나 인근 군산시 성산면 나포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썼다.

시인은 1962년 3월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 이사로 선출되어 전북 문단 활성화에 이바지하였고, 1965년 3월에는 김제 최초의 동인지 『향토문학』을 발간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신석정 시인이 직접 발문을 써 준 처녀시집, 『길』을 출간하였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66년에는 제2 시집 『빛과 사랑의 시』을 출간했다. 홍석영은 발문에서 그의 시를 “세정(世情)에 조련찮은 시인의 생리로 하여 산고를 겪으면서 인간의 절실한 내적 필연성에서 움트게 된 생명의 소박한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시인은 1970년 11월 한국문협 김제지부를 창립하면서 초대지부장으로 선임되어 김제 문단 활성화와 김제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0년에는 시집 『모과』를 냈고, 1971년에는 시집 『우러러 사는 풍토』와 채규판, 강상기 시인과 함께 3인 시집 『이색풍토』를 출간하였고, 1975년에는 여섯 번째 시집 『3월의 모음(母音)』을 출간했다.
 
 
그러나 시인의 시적 태도는 첫 시집에서 여섯 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었다. 특히 그의 시 「자화상(自畵像)」에서 보듯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변함없이 자신만의 삶을 가꾸려고 한 것 같다.



<전략>

어디를 가나 흙내를 풍기지만

흙을 외면할 순 없으리라.



산을 배경으로

영토는 넓고

<중략>

죽음과 영원과 사랑의 뿌리 깊은 나무에서

나를 결실하며

우러러 한없이 열린 길을

나두야 나만큼은 열고 간다.

-최학규 「자화상」에서



시인은 멀리 산을 배경으로 하고 그 아래 펼쳐진 넓은 평야의 흙내 풍기는 곳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음과 영원과 사랑의 섭리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한순간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시인의 삶은 항상 경건하였으며, 주어진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배경에 담긴 현실을 받아들였고, 또 그 문제를 확인하여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고자 하였다. 특히 시인과 함께 공동시집 『이색풍토』를 출간한 채규판(원광대 명예교수)은 「고산 최학규 선생을 생각하며」 (전북문단 통권 제7호, 1990)에서 그의 시를 평가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형식에도 구속받지 않은 상태에서 시 쓰는 데 몰입하였고 항상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진행하였다. 시인의 시에는 어떤 게으름과 오만함도 없었으며, 한순간도 심미적 자아 성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렇듯 시인은 항시 맑고 깨끗해지려고 노력했고, 아름다운 것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늘 고독하기도 했지만, 시인은 시를 통하여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기에의 지향’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나는 그 많은 허물을 벗고

객관적으로 서면

나무가 된다.



<중략>



벼랑에 서도 바위를 애착하며

인간에 몰리어도 人形을 사랑하며

모연이 자욱한 날에도 미소를 피우며

해가 기울어도 기도(祈禱)의 자세는 수직(垂直)으로



영원의 가지에 단풍(丹楓)이 들면

나는 견고(堅固)한 나목(裸木)이 된다.

-최학규의 「견고(堅固)한 나무」의 일부



시인은 어느 때나 생각이 분명하고 뚜렷했던 것 같다. 원래 ‘인간적 질서에의 회귀’라는 말은 인간 본질에 관한 확인일 것인데, 시인에게 시는 언제나 매우 정직한 도전의 과정이었다. 시인은 이렇듯 한결같이 견고(堅固)한 나무로 우리 곁에 서고자 하였다.

시인은 1971년 11월에 제5집을 『우러러 사는 풍토』를 낸 뒤, 3년간 쓴 작품 중에서 새로 66편을 골라 시집 『3월의 母音』을 내면서 그 서문에서 “파고들어 시의 바탕은 따뜻하고 싶다. 원래 고독한 인생은 더욱 따뜻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심에서이리라”라며 한순간도 ‘새로움’을 궁구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대가 달라졌다

시대를 따라가기도 바쁘다

이런 의미에서도 젊고 싶다



세월은 가는데 낡은 것은 싫어진다

이런 의미에서도 시는 새롭고 싶다.

-최학규의 『3월의 모음』 서문에서



이렇듯 시인은 어떤 시기나 관점에 고착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이런 태도는 시를 쓰는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시인은 원광대 채규판 교수와 아주 각별하였던 것 같다. 그와 만나면 밤을 새워 시와 문학을 논했다고 전해진다. 1975년 추석을 앞두고 시인은 그와 만나기로 했다. 시인은 그를 만날 기쁨에 아침부터 서둘러 농약을 하다가 그만 농약 중독사고를 당했다. 결국, 시인은 유명을 달리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채 교수는 매우 놀라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시인과 공동시집을 낼 만큼 가깝게 어울렸던 채 교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채 교수는 시인을 “시를 천직(天職)이라고 뼈아프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시인”이라면서 시인의 시에는 “최소한의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삶에 있어서 긍정의 방법을 선택해 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라고 했다. 시인은 그렇게 떠났지만, 그를 따르던 동료와 후생들은 시인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1981년 11월, 김제시 교동 성산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天門冬(천문동) 푸른 골짝을

은하가 이어 흘러

내 가느단 血管(혈관)에도

푸른 물소리 스며

든다.


七層塔(칠층탑) 감고 넘은

검푸른 하늘에는

상기 푸른 입김이

서려 있어라.


沈默(침묵)과 더불어 자리하신

부처 앞엔 念佛(불념)도 되려

俗(속)된 푸념 같아 머리끝까지 젖어드는

木鐸(목탁) 소리에

차리리 눈을 지그시 감아 본다.

-古山의 시 「금산사」 전문


시인은 우리에게 동양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자연 친화적 일체감을 노래한 시인, 그리고 서정성 짚은 작품을 통해서 많은 공감을 준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필자는 최학규 시인을 추적하면서 시인의 동향인(同鄕人) 최현호 씨가 시인과 관련된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권의 일기와 세 권의 미발행 친필시집, 그리고 많은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1929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과 사회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일기와 미발행시집 <창작시집>, <불평을 노래합시다>, <고산시선> 등이다. 이 자료들은 곧 우리 문단에 공유되어 최학규 시인의 삶과 문학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현호 씨에게 거듭 감사드리며, 머지않아 전라북도문학관에서 최학규 시인의 문학이 활짝 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