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수(1924-2007)는 정읍시 태인에서 태어났다. 태인보통학교를 마치고 194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평생 의사로 살았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남북의 대립과 갈등, 민주화의 열망이 가득했던 시대를 살아왔다. 대학 재학 중에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군의관으로 차출되어 중국 대륙에서 전쟁터를 누비고 다녀야 했다. 해방 이후,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의 군의(軍醫)로 징발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런가 하면 9.28 수복 이후에는 인민군에게 부역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고, 곧 풀려나서는 국군의 군의관으로 중부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이렇듯 선생의 인생 전반부는 격랑의 소용돌이였다. 일본군에서 인민군으로, 다시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전전함으로써 그의 삶은 20세기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삶과 죽음의 극한 상황을 거듭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만주 벌판에 비는 자꾸 구지고 부상병들은 야영에 울고 우리는 벙어리부대 이역만리에서 소리 없이 아, 소리 없이 노래를 불렀다. 누구를 위한 대열이기에 <하르빈> 참호를 붉은 피로 물들여
시인은 국권침탈이 일어났던 1910년, 전북 김제시 청하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정읍농업학교 재학시절 조선일보 학생문예에 시가 당선된 바 있다. 시인의 일기문에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문학적 재질로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음을 보여준다. 1929년 정읍농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신병 때문에 곧 귀국하였다. 그 후 도내 중학교에서 15년 남짓 교직 생활을 하였으며, 시인의 나이 54세 되던 해인 1963년에는 『현대문학』에 시 「나의 문」을 발표했고, 1964년 「꽃」이 추천되면서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시인은 50대 중반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절실했다. 당시 익산에는 “남풍”이라는 시 동인회가 있었는데, 시인은 이 동인회에서 좌장을 맡기도 했다. 대부분 현직교사인 그들은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한 사람도 빠지지도 않고 모두 나와 활발하게 시와 문학을 논의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자기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식탁엔 아침부터 메뉴에도 없는 피곤이 오르고, 그대와 나 말없이 담배만 피우며 끄며” 얼핏 보면 일상에 지친 나른한 모습들이었지만, 그들의 시에 대한 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