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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현장에서 동료가 숨졌다, 그의 죽음이 매일밤 찾아왔다

[방치할 수 없는 비극 '산업재해'·(下)] 남겨진 노동자의 트라우마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 항상 불안해
사고가 내 잘못으로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날벼락 같은 일로 몸도 아프고 트라우마도 겪으면서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고 억울해

 

한 노동자가 숨졌다.

지난 2019년 1월25일 김포시 고촌읍의 한 공동주택 공사현장. 함바 식당(건설현장에서 운영되는 식당)에서 먹은 밥이 채 소화되기 전이었다.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앞두고 임시 포장된 언덕을 올라가던 레미콘 차량이 4m 아래 거푸집 작업장을 덮쳤다.

현장에서 형틀 목공 작업 중이던 이현재(가명·62)씨 눈앞으로 4t짜리 거푸집이 넘어왔다. 동료의 도움으로 겨우 거푸집을 빠져나온 현재씨가 마주한 것은 전도된 레미콘 사이로 삐져나온 누군가의 '다리'였다. 커다란 레미콘이 전국 곳곳을 돌며 15년 넘게 함께 일한 두 살 아래 동료 배모씨를 깔아뭉갰다.

"레미콘에 깔려 다리만 보이는데 그때 느낌이, 죽었구나…."

그의 동료는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와 그의 동료는 강원도 영월의 한 건설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잠만 따로 잤지, 같이 밥 먹고 일하고 거의 종일 붙어 있는 친구였어. 현장에서 만났지만, 마음이 잘 맞아 오래 함께 일했지."

동료는 떠났고, 현재씨만 남았다.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사고가 현재씨를 괴롭힌다. 매일 같이 죽은 동료가 나오는 꿈을 꾼다. 수면제를 먹어도 4시간 이상 잠들지 못한다. 그러다 술에 손을 대고, 술 없인 잠들기 어려워졌다. 열흘에 한 번 입안을 점령하는 염증 탓에 밥맛도 잃어 점점 말라 갔다. 80㎏에 가까웠던 몸무게는 62㎏까지 줄었다. 

 

거푸집 작업장 덮친 레미콘 차량
"밑에 깔린 친구 다리만 보였다"
2년 지났지만 아직도 악몽 시달려

 

"주위에서 '뭐 그런 걸로 그렇게 힘들어 하냐'고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돼. 사람들이 왜 극단적 선택을 하는지 정말 몰랐는데 이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노임도 없다. '생활고'가 현재씨의 삶에 멍에를 씌웠다. 사고 이후 9개월 만인 2019년 10월에서야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겪은 '산재 트라우마'가 그의 진단명이다.

18개월간의 정부 지원 산재 피재자 요양 급여는 지난해 8월 끊겼다. 먹고 사는 문제가 배운 일이라곤 목공이 전부인 그를 현장으로 밀어냈지만, 이내 못과 망치를 쥔 주먹에 힘이 풀렸다. 몸과 마음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여를 지내다 지난해 11월에서야 어쩔 수 없이 트라우마의 건설현장으로 다시 몸을 담기 시작했다.

 

9개월만에 '산재 트라우마' 인정
요양급여 끊겨 결국 또 현장으로
사고 이전 삶 회복 여전히 어려워

 

"출근 전날 다시 현장에 나간다고 하니까 너무 두렵더라고. 또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고 걱정돼 내리 악몽만 꿨어."

결국 그는 약을 늘렸다.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신의 증상이 '트라우마'인지조차 몰랐던 현재씨는 사고 두 달이 지나서야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병원도 산재 요양급여 신청에 회의적이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 항상 불안해. 사고가 내 잘못으로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날벼락 같은 일로 몸도 아프고 트라우마도 겪으면서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고 억울해."

시간 날 때 책을 읽고 삶의 재미를 찾아가던 사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누군가에겐 소소한 일상이 산재 트라우마 나락에 떨어진 현재씨에겐 고행이 됐다.

 

 

트라우마 인지 못하고 혼자 고민… "초기 치료 놓치면 만성화"

 

 

 

트라우마는 초기 발병했을 때
개입해서 심리적 상담을 해줘야 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만성적인 문제가 된다

 

한국사회가 이현재씨처럼 산업재해 사고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지난해 3월 전국 8곳에 '직업트라우마센터'를 설치했다.

산재 사고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들의 회복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다. 센터는 중대재해뿐만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 등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사고로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에게 전문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인 지역에는 현재 인천과 부천, 경기 서부, 경기 동부, 경기 북부 등 총 5곳의 센터가 있다. 올해 문을 연 경기 북부를 제외하고 지난해 경인 지역 센터 4곳을 찾은 노동자는 인천 181명, 부천 201명, 경기 서부 148명, 경기 동부 159명 등 총 689명이다. 

 

경기·인천 5곳 '직업 트라우마센터'
작년 4곳 689명 찾아 전문심리상담

 

직업 트라우마 치료는 초기 개입이 중요하지만, '때'를 놓치는 노동자가 아직 많다고 한다. 자신이 산재 사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노동자들이 아직 많다는 이야기다. 현재씨도 자신의 증상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에서 도움을 받았다.

정혜선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장)는 "트라우마는 초기 발병했을 때 (센터가) 개입해서 심리적 상담을 해줘야 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만성적인 문제가 된다"며 "초기에 빨리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면 회복 속도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면서 회복 탄력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정조웅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 상담심리사도 "마음이나 심리적 문제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는 경우가 많고 정확하게 현재 증상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적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때 놓치는 사람 많아 뒤늦게 도움
직접 재해 현장 찾아 상담 안내도

 

이 때문에 산업 현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센터 상담사들은 직접 사고 현장을 찾는다. 초기 개입은 물론 트라우마 관리의 필요성을 모르는 노동자들이 나중에라도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센터의 방문을 사고 관련 조사로 인식해 상담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정 교수는 "중대재해는 고용노동부 연락을 받고 갈 때도 있는데, 찾아가면 사업주는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아내려 온다고 생각해 배척하며 경계심을 갖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센터는 초기 개입 이후에도 사후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노동자가 안정화가 됐다고 해서 상담을 종료하는 것이 아니라, 추가 상담이 필요하다면 횟수 제한 없이 상담을 진행한다. 병원 치료가 필요하면 병원을 연계해 노동자의 일상 회복을 돕는다.

하지만 노동자의 트라우마 관리는 여전히 '예방사업' 정도로만 치부된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크지 않다는 인식 탓에 투입되는 예산은 제한적이다. 경인 지역에만 트라우마 센터 5곳이 있다곤 하나 인구와 면적을 고려하면 부족한 실정이다. 실제로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는 부천, 김포, 고양뿐만 아니라 서울 남부권까지 담당하고 있다. 

 

가시적 성과 적어 '투입 예산' 제한
중앙정부·지자체 '추가 지원' 필요

 

추가적인 센터 건립과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 센터 관계자는 "경기도가 직접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힘들 수 있겠지만, 우리와 같은 지역 내 센터들이 더 활성화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하고 계획을 세우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도의회 경제노동위원회 김장일(민·비례) 부위원장은 "산업 현장에서 사고를 겪거나 목격한 사람들이 겪을 트라우마가 상당할 것"이라며 "조례 등 경기도가 트라우마로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