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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 폭의 진경산수화 속 자장율사 깊은 불심 깃들었네

[조선시대 핫 플레이스, 강원의 명소는 지금]정선 정암사-(18)

 

 

꿈 속 구렁이 똬리튼 곳 석남원 창건
닷새걸릴 정도 첩첩산중 속 자리잡아
수마노탑에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 돼
정암사·적조암터 거쳐 만항마을까지

자장율사 머물다 간 발자취 남아있어

자장율사가 말년에 수다사에 머물 때였다. 하루는 꿈에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보자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다시 태백산 갈반지에서 만나자며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찾다가,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갈반지임을 알아차렸다. 이곳에 석남원(石南院)을 창건하니, 이 절이 정암사(淨岩寺)이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정암사가 지어지게 된 내력이다.

이식(1584~1647)의 정암사(鼎巖寺)란 시 중 일부분이다. 지금은 몇 시간이면 도착할 정도이지만 예전엔 닷새나 걸릴 정도로 첩첩산중이었다. 만항재로 가는 길옆에 있는 정암사 주변의 묘사가 진경산수화 같다. 정암사(鼎巖寺)라 기록한 것이 이채롭다. 1778년 경에 호가 화암(畵岩)인 사람이 정선지방 8경과 여기에 18폭을 더해 두 개의 화첩을 꾸몄다. 거기에 「갈천산정암(葛川山淨菴)」이 화제시로 실려있다. “갈천사를 찾기 위해, 마침내 태백산에 들어서니, 세상은 멀어 안개 자욱하고, 숲은 깊어 해와 달이 한가롭네” 꾸준히 정암사에 대한 시가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주문엔 태백산 정암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바로 인근의 산은 함백산이지만 민족의 영산인 태백산으로 표기한 것은 예전부터였다. 범종각을 지나 오른쪽으로 극락교를 건너나자 자장율사가 사용하던 주목 지팡이를 꽂아놓았다는 주목이 한 그루 서 있다. 본래의 줄기는 죽었지만, 그 틈에서 나온 가지들은 뻗어 무성히 자라고 있다. 바로 옆은 적멸궁이다. 수마노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참배하기 위해 세운 법당이다.

적멸궁 뒤쪽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탑에도 스토리가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하는데, 마노 앞의 수(水) 자는 자장의 불심에 감화된 서해 용왕이 동해 울진포를 지나 이곳까지 무사히 실어다 주었기에 ‘물길을 따라온 돌'이라 하여 덧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자장이 이곳 갈반지를 찾아 절을 세우고 이어서 탑을 세울 때 세우면 쓰러지고 다시 세우면 또 쓰러졌다. 백일기도에 들었더니 기도가 끝나는 날 눈 덮인 위로 칡 세 줄기가 뻗어 나왔다. 하나는 지금의 수마노탑 자리에, 또 하나는 적멸보궁 자리와 법당 자리에 멈추어 그 자리에 탑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속칭 갈래사라고도 불렀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원래는 수마노탑 외에 금탑, 은탑이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사람들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질까 두려워 보이지 않게 감추었다고 한다. 김신겸(1693~1738)은 「정암(?菴)」에서 “수마노탑 노을 속에 들어가니, 우뚝 솟아오른 걸 우러러보네. 아래에는 마른 나무 한 그루, 생사의 끝을 알 수가 없구나”라고 노래했다.

자장율사 순례길은 정암사에서 적조암터를 거쳐 만항마을까지 이어진다. 적조암은 자장율사가 머물다가 입적한 암자다. 입적과 관련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자장율사가 석남원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고 온 늙은 거사가 찾아왔으나 문수보살임을 알지 못했다.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말하고 떠나자 뒤늦게 알아채고 쫓아갔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결국 몸을 던져 죽었고, 화장한 뒤 유골을 석혈(石穴)에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큰 스님이라도 나를 중심으로 한 생각인 아상(我相)을 갖고 있으면 부처님을 보기 어렵다는 깨우침을 준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편집=홍예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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