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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이어령, 경계 넘어 창조적 활동 펼쳤던 ‘시대의 크리에이터’

문학평론가·언론인·작가·교수
‘한국인’·‘디지로그’ 등 키워드
암 투병 중에도 말년까지 집필
‘흙속에 저 바람속에’ 등 펴내
88올림픽 ‘굴렁쇠 소년’ 기획
문화도시 ‘광주만의 톤’ 강조도

지난 26일 별세한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문학, 언론, 학문, 출판, 문화 기획, 행정 등 다양한 방면에 큰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변화의 시기마다 특유의 혜안과 통찰로 시대정신과 문화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20대 초반 문학 평론으로 문단에 등단한 고인은 평론가 외에도 소설가, 시인 등 문인으로 활동했으며 대학 교수로, 문학 이론가로도 탁월한 자취를 남겼다.

그의 활동은 문학의 경계를 넘어 언론 분야에서도 두드러졌다. 고인은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비롯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당대 최고 논객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1958년 서울대 국문과 동기였던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와 결혼했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은 고인과 부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고인은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시대의 지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고인의 사유와 저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우상 파괴’, ‘한국인’, ‘문화’, ‘디지로그’, ‘창조’ 등으로 집약된다.

그를 문단과 지성사에 명확하게 각인시킨 것은 데뷔작 ‘우상의 파괴’였다. 고인은 이 평문에서 당시 문단의 거두였던 김동리를 비롯한 문단 선배들의 가식적 행태를 ‘우상’이라고 비판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1968년 시인 김수영과 문학의 현실참여 문제를 두고 ‘불온시’ 논쟁을 벌였다. 당시 고인은 문학이 사회 비판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문학의 예술성을 강조했다.
 

이어령 교수가 천착했던 부분은 한국의 문화였다. 초기 대표작이자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 문화론’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 풍토에 관한 글을 제의받은 그는 풍토라는 말을 우리말로 바꾸고 순서 또한 바람과 흙으로 뒤집는 기발한 발상을 이끌어냈다. 책은 당시 국내에서만 1년간 10만 부가 팔렸다.

고인의 또 다른 대표작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한국인이 쓴 책으로 일본에서 처음 베스트셀러가 돼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 교수는 일본 외무성 초청으로 동경대 비교문학과 교수를 역임 중이었다. 일본 문화의 특징을 ‘축소지향’으로 본 고인의 통찰은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의 발전은 축소지향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반면 침략과 관련된 확대지향의 시도는 실패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고인은 생전에 광주가 문화중심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혔다. 예향 광주에 대한 그의 애정과 기대는 오늘의 관점에서 문화중심도시로서 광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지난 2006년 4월 20일 광주일보 창사 54주년을 맞아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도시의 건축물, 환경, 거리 등도 문화적이어야 하지만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광주만의 톤’이 있어야 한다”며 “문화 마인드가 하루아침에 갖춰지는 것은 아니니 어릴 때부터 어린이들에게 미의식과 과련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광주시민들에 대한 기대가 크다”며 “계산적이고 각박한 서울사람들이 디지털형 인간, 다소 느리고 여유가 있는 충청도 사람들이 아날로그형이라고 한다면 광주는 이 두 가지를 갖춘 ‘디지로그 형 인간’에 가깝다”고 언급했다.

고인은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내는 등 문화 기획자로서도 남다른 업적을 거뒀다. 고인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연출한 ‘굴렁쇠 소년’은 세계인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0년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고인은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아 문화정책의 틀을 새로 마련했다. 특히 장관 재임 시 국립국어원을 비롯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도서관 업무 이관, 전통공방촌 건립 등을 마무리 지었다.

고인은 한국이 산업사회에서는 늦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앞설 수 있다고 설파했다. 스스로를 ‘크리에이터’라 불렀던 그는 ‘창조’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2009년에는 창조학교를 건립해 명예 교장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 무신론자였던 고인은 말년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 검사로 활동하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장녀 이민아 목사의 암 투병과 실명 위기 등이 고인으로 하여금 개신교 신앙을 갖게 한 요인으로 전해진다. 이어령 교수는 신앙을 고백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펴내며 “제가 처음 쓴 내면의 이야기입니다. 저의 약점, 슬픔을 고백한 일종의 일기장이라고 할까요”라고 밝힌 바 있다.

고인은 지난달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 1권 ‘메멘토 모리’(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를 펴내는 등 마지막까지 생의 본질을 추구했다. 그가 펴냈던 다양한 지성의 저작은 이제 독자들 곁에 남았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