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년 전인 1894년, 이 땅에서는 거대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전북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 행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http://www.lpk.kr/data/photos/20250416/art_17447641393085_038a01.jpg)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시작됐다. 호남평야는 조선시대 쌀 생산의 중심지였지만,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항거한 농민들의 민란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는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60만명에 달하는 백성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은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 봉기로, 그 과정에서 자치 개혁기구인 ‘집강소’를 설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았다.
고부민란으로부터 2년간 전개됐던 동학농민혁명은 3만~5만명이 희생된 가운데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1894~1895년에 발발한 혁명과 관련한 기록물이다.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 민간인이 남긴 문집과 일기, 조선정부가 생산한 보고서·공문서 등 총 185건(1만3132면)에 이른다.
![사발을 놓고 빙 둘러서 이름을 써 넣어서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한 사발통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http://www.lpk.kr/data/photos/20250416/art_17447641395099_80b311.jpg)
1894년 동학농민군 유광화는 고향에 있는 동생 유광팔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우리가 왜군과 더불어 오랫동안 싸운 것은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함이라네’라며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나주 일대에서 지도자급으로 활약한 유광화는 1894년 12월 화순 도곡에서 3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이 편지는 동학농민군의 합리적인 군수물자 조달과정, 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어려운 실상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혁명에 나섰다가 체포된 한달문은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늘 나주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어 우선 굶어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오. 돈 300냥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시오’라고 감옥의 절박한 사정을 알렸다.
기록유산에는 전봉준의 심문기록인 공초도 포함됐다.
그는 심문을 받을 당시 자신은 논 세 두락을 부치므로 하등 빼앗긴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너는 피해가 없는데도 무슨 까닭으로 소요를 일으켰느냐”고 물으니 그는 “일신의 피해 때문에 기포한다면 어찌 남자의 일이겠느냐. 중민이 원통해 하고 한탄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 기록물은 동학혁명기념재단을 비롯해 국가기록원,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등 11곳이 기관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앞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10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신순철)이 설립됐다.
이어 2015년 6월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기록물의 범위와 대상을 선정했다. 그해 8월 등재신청서를 국가유산청에 제출했지만, 신청 대상에 오르지 못했다.
추진위는 포기하지 않고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국제학술대회와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도록을 발간했다.
국가유산청은 심사를 거쳐 2017년 6월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유네스코 신청 대상에 선정했다.
그런데 유네스코는 2017년 12월 제도 개선을 이유로 세계기록유산 등재 일정을 중단됐다. 일본이 중국의 난징대학살 기록물 등재(2015년)와 관련, 희생자 수에서 양국이 견해 차이가 있다며 유네스코의 돈줄인 분담금 제공 중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2021년 4월 집행이사회가 투명성 확보와 회원국 참여 강화를 위한 개선안을 승인하면서 등재를 재개했다.
국가유산청은 2021년 11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등재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했고, 2023년 5월 18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2015년 첫 도전 이후 8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전북 정읍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상징조형물인 '죽창결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http://www.lpk.kr/data/photos/20250416/art_174476414032_b3cb40.jpg)
“동학혁명의 세계적 가치를 알리겠다”
■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인터뷰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도층에 저항하면서, 평등한 세상을 바랐던 민중의 외침이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라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체제를 설치했는데, 19세기 당시 전 세계 어디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는 없었다”며 “아울러 농민군의 기록물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 기억의 저장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15년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장에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을 임명하는 등 19명으로 구성된 추진위를 구성했다”며 “여기에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자와 기념사업 관계자, 유족, 기록유산 전문가,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 정읍시, 기념재단이 공동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록물에는 임명장과 회고록 등 동학농민군 기록, 진압에 가담한 관료 및 진압군의 공문서와 보고서 등 조선정부 기록, 민간인의 문집 및 일기 등 민간 기록, 개인이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한 개인 견문 기록이 포함됐고, 전통 한지에 기록한 문서 및 책자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그는 향후 과제로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를 꼽았다.
이 부장은 “기념재단은 기록물의 아카이브 구축, 등재기록물 특별전시, 등재기록물 해제집(소개서) 발간, 국제학술대회 등 사업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가치를 더욱 널리 알리겠다”고 말을 맺었다.
![전북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 특별 전시 모습.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http://www.lpk.kr/data/photos/20250416/art_17447641406883_2fe87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