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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구상 문학관

종교·역사와 현실 사이, 詩 처럼 살다 가다
독실한 천주교도 '안빈의 삶' 실천... 일제 치하·한국 전쟁 등 역사 굴곡
‘레이더 사건’ 연루돼 투옥 고초... “사형 아니면 무죄 달라” 최후진술 유명
85세 타계 ‘구상’ 등 8권의 시집 남겨...시인 소장도서 2만여권 함께 전시

 

어느 결에 겨울이 문턱에 당도해 있다. 소리 없이 저물어간 가을 자리에, 겨울이 슬며시 다가와 있다. 가을은 그렇게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맘때면 문득문득 막차를 기다리는 나그네의 심사가 느껴진다.

이 계절에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주제는 인간과 인간애다. 구상(具常1919~2004) 시인. 그는 인간의 휴머니티를 추구했던 구도자와 같은 시인이다.

그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구상(構想)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뭔가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 형상화하는 예술가적 감성 말이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이곳에 구상문학관이 있다. 지난 2002년 10월 개관했으며 2층 본관 건물과 관수재라는 한옥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실, 영상실, 북카페와 보존서고 등도 갖추고 있어 다양한 문화 행사가 가능하다.

 

 

여타의 문학관과 유사한 구조이지만, 생전의 시인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2만여 권이 넘는 책들이 품어내는 서지향(書之香)은 시인의 인품을 담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책을 펴낼 때 구상 시인에게 친필 사인을 해서 보낸 책들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시인에게 칠곡은 제2의 고향이다. 그러나 구상에게는 제1, 제2라는 숫자를 붙일 수 없다. 문학세계가 넓고 깊어 특정한 무엇으로 한정하기 어렵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게 그의 작품이다. 미사여구나 치장이 없는 간명한 시어는 번역하기 쉬워 외국의 독자들에게도 많이 소개됐다.
 

아마도 고전적 명제의 시인이라는 아우라와 가장 가까운 이가 구상 시인이 아닌가 싶다. 선비적 기질, 지사적 풍모, 초인적인 이미지, 종교적 절대성, 영원한 세계에 대한 지향 등… 그에게서 빚어지는 수사는 대개 종교와 구도, 생명과 진리라는 언어로 수렴된다.

 

 

1919년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그의 본명은 상준(常浚)이었다. 그러나 작품활동을 하면서 구상(具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인 탓에 그의 부친은 구상이 어렸을 적 솔거하여 원산으로 이주했다. 그의 나이 네 살 무렵이었다. 부친이 가톨릭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아 원산으로 가게 된 때문이었다.

구상의 외가 또한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이었다.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가장 강력한 부분은 정신적·영적 영역과 연결된다는 지점이다. 특히 시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구상의 가슴에는 늘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이 자리했다. 문학관 전시실 벽면에 쓰여 있는 글귀는 아들과 동생에게 주는 금언과도 같은 말이다. 아버지는 소천하기 며칠 전 “너는 매사에 기승을 하지 말라! 아무리 외롭고 바른 일이라도 기승을 하면 위해를 입느니라”면서 “조금 줄여서 사는 것이 조금 초탈해 사는 것이니라”(感省一分便超脫一分·감성일푼편초탈일푼)고 말했다.

가톨릭 신부였던 그의 형은 구상에게 아시시프란체스코 성인의 말씀을 주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너에게 내려주신 모든 은혜를 도로 거두어 도둑들에게 나누어 주셨더라면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감사를 받으실 것을…….”이라는 말이었다. 매사에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안분하고 자족하라는 의미일 터였다.

구상의 문단 데뷔는 8·15 해방 직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발간한 동인시집 ‘응향(凝香)’에 ‘길’, ‘여명도’ 등이 수록되면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 그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로부터 반동시인으로 규탄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다 47년 월남해 서울에 정착한다. 월남 후 얼마 안 있어 6·25가 발발하면서 북의 가족과 이별, 그리고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을 체험한다. 이후 구상은 종군 작가로 지원해 칠곡의 군부대에서 발행하는 신문 주간으로 근무한다.

그렇다면 구상은 왜 서울에 정착하지 않고 칠곡 왜관으로 내려왔을까. 문학관 관계자의 말은 이렇다.

“당시 우리나라 베네딕도 수도원이 원산과 칠곡 두 군데에 있었습니다. 구상 시인은 언젠가는 북의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칠곡 왜관에 정착했겠지요. 특히 이곳 문학관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생전에 선생님은 강을 많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마 생명의 시원성, 원초적인 궁극의 세계가 물과 연관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문학관 앞으로는 상주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흐른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를 넘어 흐르는 강은 쓸쓸하면서도 고적하다. 상흔의 강! 6·25 때 이 강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의 포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무심한 듯 일렁이는 물결이 전해오는 것은 평화와 자유, 영원 같은 묵직한 울림이다.

한때 구상 시인은 ‘레이더 사건’이라는 사건에 연류 돼 고초를 겪은 적이 있다. 1959년 봄 국가보안법 파동 때였다. 구상은 연사로 나서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는데, 당시 공안당국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시인은 15년형을 구형받았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무죄 선고를 받는다. 당시 그가 최후 진술에서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가 되느니보다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고 주장했던 말은 유명하다.

구상은 만 85세로 타계하기까지 모두 8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구상(具常)’, ‘초토(焦土)의 시(詩)’, ‘밭일기’, ‘그리스도 폴의 강’등이다. 시인은 ‘나의 시의 좌표’라는 글(‘구상문학총서’, 홍성사, 2002)에서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바 강렬한 휴머니티와 새로운 시대 정신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영원 속의 현존을 추구하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삶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시였다. 시처럼 살다 간 인생이었다. 문학관을 나오며 오늘의 시인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일의 시인을 가늠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시인으로 태어난 것 같다. 구상이 희원했던 것은 우리 생의 영원을 비추는 영원한 불빛이 아니었을까.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