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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5) 분단 극복과 통일을 노래한 시인 박봉우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시인은 1934년 7월 14일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승주 군수를 지낸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김효정 사이에서 3남 2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시인의 학창시절은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 광주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과 광주고등학교, 전남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이 당선된 후 서울 생활을 거쳐 전주로 내려와 살다가 1990년 3월 1일에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혹자는 박봉우 시인은 전남, 광주 사람인데, 전북의 작고 문인으로 거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박봉우 시인은 이 고장 전주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우석대 문신 교수는 「절대 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한 시인 박봉우」라는 논문에서 “박봉우 시인은 전주에서 혹독한 피로 자신의 영혼을 물들였다”라고 하면서 전주와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전주에 있을 때 시인은 그토록 갈망했던 분단 현실과 통일 조국, 군부 독재를 향한 반전(反戰), 반독재의 윤리가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자신을 대신하여 남부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던 아내를 잃었고, 마지막에는 활화산보다도 더 뜨거운 심장으로 지키고자 했던 자신마저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 외에도 전주 문인들과의 추억, 그리고 젊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끼친 영향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최명표 박사의 기념비적 명저 『전북 작가 열전』에서도 시인의 삶과 문학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고려하였다.

박봉우 시인의 삶은 크게 3기로 나누는데, 그것은 광주에서의 유소년기(1~23세), 서울에서의 청년기(23세~42세), 전주에서의 장년기(42세~57세)다. 어린 시절, 광주를 배경으로 한 학창시절에는 그는 문학의 신동(神童)으로 이름을 날렸다. 1952년에는 「석상(石像)의 노래」가 주간지 『문학예술』에 당선되었고, 또한 친구들과 4인 시집 『상록집』을 냈다. 23세 때인 1956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이 당선된 후, 그의 서울 시대가 펼쳐진다.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신동엽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그가 명동 거리에 나타나면 아르뛰르 랭보가 나타난 듯 요란했다고 한다. 4월 혁명 정신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서 왜곡되자 시인은 그때의 분통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4월의 피바람도 지난

수난의 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갈라진 가슴팍엔

살고 싶은 무기도 빼앗겨버렸구나

_「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의 일부

 

이 시절 박봉우는 기인으로 알려졌다. 항상 술에 취해 있었으며,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전날, 한 술집에서 ‘빨치산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취재차 내려간 지방에서 집단폭행을 당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정신병동에 격리되기도 했다. 그의 서울살이는 정신분열, 생활의 불능, 타인과의 불통이 겹치면서 매우 고달팠다. 1965년(32세)이 되어서야 6년 동안이나 미루어 온 결혼식을 탑골공원에서 했다. 이날 결혼식에는 장녀 나리와 장남 겨레가 특별 하객으로 함께 했다고 한다. 분단의 아픔에 괴로워하고 통일을 염원했던 시인은 독립선언의 역사적인 현장에서 결혼함으로써 시인의 시대정신을 드러냈다.

그가 전주로 오기까지에는 시인의 고교 동창이었던 당시 이효계 전주시장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박봉우 시인이 서울에서 매우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시장은 그를 전주시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배려한 것이다. 시인은 1975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서울 하야식(下野式)」(1975)을 발표한 후 전주로 내려왔다.

 

끝나지 않았다

모두 발버둥치는 벌판에

풀잎은 돋아나고

오직 자유만 그리워했다

꽃을 꺾으며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亂軍)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

나는 떠나련다

서울을 떠나련다

-「서울 하야식(下野式)」의 일부
 

 

 

전주로 내려온 시인은 1990년 3월 1일, 57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전북의 문인들, 그리고 각 대학의 문학 지망생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소재호(현, 전북예총회장)는 「박봉우 시인의 전주에서의 삶, 그 흐린 하늘」에서 박봉우 시인은 하루를 술로 시작해서 술로 마쳤지만, 자기 시를 줄줄 외는 등 그의 기억력이 빼어나게 출중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천재성은 남을 포근하게 감싸면서도 그 어디에도 오만함은 없었지만, 다만 시에 대해서만은 혹독하리만치 비판의 서슬이 파랬다고 했다.

장교철(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자신의 시집 『황지의 풀잎』을 주면서 ”시인은 시대를 꿰뚫는 시대 정신을 가져야 한다“라던 박봉우 시인을 기억했다. 한 번은 박봉우 시인과 함께 문인들의 회식 장소를 찾아갔는데, 시인의 꾀죄죄한 옷차림과 술 취한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문전박대하자, 매곡교 부근 시인의 단칸 셋방으로 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던 일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1990년 박봉우 시인의 장례식에서 자작 조시를 낭독한 백 학기(시인, 영화배우)는 ”민족분단의 비원을 가슴에 품고 통일의 의지를 노래했던 시인의 삶”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봉우 시 연구」라는 논문에서 ‘시인의 시는 분단상황 인식과 그 극복 의지, 내밀화된 사랑의 풍경, 혁명과 민중적 세계관, 그리고 세상과 따뜻한 소통 그리고 화해’ 등이 잘 담겨 있다고 하였다.

시인이 돌아가신 지가 30년이 지났지만, 전주의 문인들은 박봉우 시인과 함께한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효자 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지만, 평생 시인이 열망했던 꿈은 절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참고 : 문신 「절대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한 박봉우 시인」, 백학기 「박봉우 시 연구」 (2000), 최명표 『전북작가열전』(2018)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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