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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일본의 귀 · 코무덤, 한국에 이전 주장은 생각해 볼 일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명예회장 특별기고

정유재란 때 왜병의 잔학상 보여줘
왜인(倭人)들 자손만대(子孫萬代)까지 두고 봐야
일본, 처리 못해 크게 골치 앓아

 

 

일본 교토(京都)에 가면 귀무덤(코무덤)이 있다. 그 귀무덤(耳塚), 코무덤(鼻塚)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1597년,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들이 그들 군사들의 무공을 확인하고, 또 개인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기 위해 그 증거물로 우리 조선인의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저희들 본국에 보낸 것을 땅속에 묻은 무덤인 것이다. 그것을 ‘귀무덤’ 또는 ‘코무덤’이라고 부른다.

당시 왜적들은 조선에서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이고, 생 사람의 코와 귀까지 베어 저희들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 독전관(督戰官)을 통해 보냈던 것이다.

그 때 우리 나라에는 귀와 코를 잘린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생사람의 귀와 코를 자르다니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이는 세계 전쟁사상(戰爭史上)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왜군의 만행이었다. 이에 대한 일본인 학자의 기록을 보면,

 

1597년 경장전역(慶長戰役·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조선 침공의 선봉장이기도 했던 기쓰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이 사람의 경우는 ‘요시카와’라 하지 않음)라는 자가 이 해 2월 17일 도요토미가 파견한 독전관에게 금시 베어 온 조선인의 코 358개를 바치고 수령증을 받고 득의에 찬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이 해 9월에서 10월초까지의 사이에 조선인의 코를 무려 1만 8350개를 바쳤다. 당시 왜군은 조선의 도처에서 학살, 방화, 약탈 등을 일삼았는데 특히 조선인만 보면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머리 대신 귀를 자르다가 다시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보냈던 것이다. 이를 풍신수길은 교오토의 방광사(方廣寺) 서쪽에 ‘귀·코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잔인무도한 짓인가. 이는 일본 도쿄(東京) 히토쓰바시(一橋)대학의 나가하라 케이지(永原慶二) 교수가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밝힌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남원의 몇몇 인사들이 일본에 있는 ‘귀무덤·코무덤’을 만인(萬人義塚)옆에 옮기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또 전북대 의대 박모교수도 우리나라에 모두 가져와야 한다고 중앙의 모 일간지에 투고한바 있었다. 애국심에서 나온 말이다. 참으로 일리가 있고,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 ‘귀무덤·코무덤’은 과거 일본인들의 잔인무도함을 보여준 역사적 증거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나라에 가져오다니 그것은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필자의 생각은 우리나라에 가져오는 것은 절대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것인가. 그 ‘귀무덤·코무덤’은 현재의 위치에서 옮긴다거나, 또는 우리나라에 가져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아직도 지난날의 죄악을 뉘우칠 줄 모르는 일본인들이 앞으로 백년이고 천년이고 그들의 후손들까지 그것을 직접 보고 저희들 조상들이 저지른 잔악상과 죄악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적(史蹟)은 원래 있었던 그 자리에 그것도 원형(原型)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현재 일본에는 쿄토(京都)외에도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1만 8350명의 ‘귀·코무덤’과 3천명이 넘는 ‘귀·코무담’이 오카야마(岡山)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모두가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눈물 없이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기막힌 역사적인 무덤인 것이다.

오늘날 그쪽 일본인들은 그 귀·코무덤을 어떻게 처치를 못해서 큰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21세기의 광명천지에 그 못되고 잔인했던 ‘코·귀무덤’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민족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한국에서 만일 가져오겠다고 한다. ‘얼싸 좋다’하고 춤도 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섣불리 ‘코·귀무덤’ 이전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좀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20여년전의 일이지만 1997년 1월, 부산의 박모라는 중이 일본에서 ‘귀·코무덤’의 일부를 옮겨 왔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리 됐는지는 잘 모르나 현재 우리 고장 부안(扶安)의 호벌치(胡伐峙)에 있다고 들었다.

설사 어떻게 돼서 이 ‘코·귀무덤’을 옮겨오게 될 경우가 되면, 그것은 국가에서 외교적, 법적으로 잘 따져서 이전 해와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에 나설만한 입장이 못되는 한사람의 종교인이 그같은 짓을 했다는 것은 당돌하기 그지없는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에 있는 ‘귀·코무덤’의 이전문제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생각하지 말고 깊이깊이 잘 생각해야 할 줄 믿는 바이다.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명예회장은...

1954년 연합신문 기자로 출발해 전북일보에서 편집국장·주필 등을 지내며 언론인으로서 현장을 누볐다. 1980년대 초 어려운 학생을 위해 전북 최초로 전북애향장학재단을 설립해 인재양성 요람으로 육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과 독립유공자 588인의 이름을 새긴 현장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전북향토문화연구회를 16년동안 이끌다 지난 2019년 명예회장이 됐다. 2015년 한국서원협회 결성 회장직을 맡아 한국서원이 201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는데 기여했으며 정읍 무성서원 원장을 16년째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