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내기 위해 잊는 법을 배웁니다 곱게 뻗은 길을 따라 무심히 걷다 보면 성근히 꽂아둔 글자를 만나게 됩니다. 실은 낱낱의 글자들이 품은 뜻을 나는 알아보지 못하니 창 틈새로 가만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저들은 이겨내기 위해 잊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칼을 들고 피를 흘려야 하지 않았냐는 의구심을 품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로부터 찌르려는 자와 막는 자의 대결에서 승자는 없었죠. 유일한 승리는 세월의 몫입니다. 그러니 이겨내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침대에 몸을 맡길 줄 알아야 해요. 선채로 곱게 잠들어 있는 저들처럼요.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깰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대결이 끝없이 생겨나는 까닭이에요. 이겨내려는 걸 잊어야 하죠. 그들이 기지개를 켜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조바심은 내지 않습니다. 기댈만한 믿음의 존재만으로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요. ☞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된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과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으로 유명하다. 화재로 인해 7차례 중수하였는데 화재 때마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맨들맨들 윤이 나는 바위 끝에 불콰하게 물든 태양이 걸렸구요. 따라서 내 얼굴도 붉습니다. 남해 바다에 귀를 씻어내도 다신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요. 훠어이훠어이 부질없습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면 코끼리만 생각나죠. 아무도 밟지 않은 계단에서 내려선 노인이 키를 훌쩍 넘긴 바위 곁에다 울타리를 두르는 동안 나는 그 주변에 서서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아니, 어쩌면 코끼리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서 미륵 못 봤소? 노인의 물음은 널따란 바위 한 덩이로 남았습니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심지어 눈도 비비지 않았죠. 훠어이훠어이 소용없습니다. 이젠 코끼리만 생각날 때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다만 이번엔 귀를 씻어낼 필요는 없겠습니다. ☞ 남근을 닮은 숫바위, 임신한 여성의 모습으로 누워 있는 암바위로 구성된 암수바위는 그 독특한 모습 때문에 아이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는 가천의 명소이다. 그러나 정작 마을 주민들에게 이 바위는 ‘미륵불’ 혹은 ‘미륵바위’라 불리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주민의 평안을 주는 미륵으로 모시는 영물이다. 마을 양옆으로 냇물이 흘러내린다고 해서 가천이라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