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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함양 남계서원] 솔향 타고 흐르는 비운의 선비 정여창의 꿋꿋한 단심

연화산 줄기 소나무 숲에 들어앉은 서원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 계승 위해 건립
김종직의 문하…무오사화·갑자사화 풍파
풍영루 푸르른 기운·연못 한가득 핀 연잎
사사로운 말잔치 넘쳐나는 세상 꾸짖는 듯

 

소나무 숲이 안온히 감싼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우람하면서도 단정한 소나무 숲은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를 닮았다. 직립의 자세는 아니다. 풍상에 자연스럽게 굽은 자태는 그 자체로도 세월의 무게를 말해준다.

오래된 소나무 숲이 발하는 향기는 그윽하면서도 깊다. 숨을 가득 몰아쉬면 솔향의 잔향이 코끝으로 아슴하게 밀려온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소나무 숲은 커다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이다. 바람에 조금은 휠지언정 꺾이지는 않으리라는 결기를 읽을 수 있다. 고고하고 반듯한 소나무가 아닌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껴안은 소나무는 인간의 역사를 대변한다.
 

남계서원(濫溪書院)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다. 우리의 자연 산천 어느 곳인들 소나무가 없으련만 이곳의 소나무 숲은 그림 같다. 동양화 화폭의 배경이 되는 그런 소나무 숲이다. 잠시 한눈을 팔면 금방이라도 신선이 나올 법한 그런 느낌이 감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에 있는 남계서원은 조선전기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학문과 덕행과 지조가 남달랐던 정여창의 됨됨이를 후세에 알리고 계승하자는 취지다. 인근 들녘에 남계(濫溪)라는 내가 흐르고 있어 자연스럽게 서원의 이름도 그와 같이 따르게 됐다.

흐를 ‘남’(濫)이라는 한자를 쓴 걸 보면 들판을 적시며 흐르는 내가 제법 풍성했던 모양이다. 남강의 옛 이름이 남계였다. 연화산 줄기 아래 들어앉은 서원은 앞으로는 제법 너른 들판과 강을 끼고 있다. 서원의 누각인 풍영루에서 앞쪽을 굽어보면 저 멀리 지리산 자락과 소담하게 이어진 들판의 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풍영루는 하나의 오래된 유물 그 자체다. 시간의 흔적이 올올하게 배여 있다. 퇴락이라는 말보다는 오래된 시간, 오래된 미래를 온몸으로 머금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군데군데 놓인 서안이 놓여 있어 마치 조선의 한 시절로 역류해 들어가는 듯하다. 서안 앞에 가만히 앉아 이곳저곳 풍경을 훑어본다.

남계서원의 ‘풍영루기’(風詠樓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볼 수 있다. “이 다락에 오르면 넓어지는 마음과 편안한 정신이 자연 속에 자맥질하여 유연히 스스로 얻은 뜻이 있다. 두류산 만천 봉우리와 화림천 아홉 굽이 흐름에서 정여창 풍표를 보고 선생의 기상을 우러러 볼 수 있으니, 흡사 선생을 모신 자리에서 증점이 쟁그렁하고 비파를 밀쳐놓던 뜻이 있는 듯해서 풍영루라고 이름 하였다.”

 

 

일두 정여창은 조선 전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호는 일두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혼자 공부에 힘쓰다 후일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당시 김굉필도 함께 학업을 했다고 전해온다. 그의 학문과 행실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당시 성종은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이를 성균관에 요청했다. 가장 첫 번째로 천거된 이가 바로 정여창이다.

이후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다. 성균관에 입학했을 때는 동료들이 그를 대표로 추천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그의 인품과 학문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안음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토대로 선정을 베풀었다. 민초들의 고통을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 등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시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시대의 격랑은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선비의 앞길을 막기 마련이었다. 바야흐로 1498년. 무오사화의 광풍이 몰아쳤다. 김종직이 세조를 비판하며 쓴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촉발시켰다.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정여창 또한 그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 정여창은 이후 1504년 54세에 숨을 거둔다. 제자들은 스승의 시신을 함양으로 옮겨왔지만 그해 가을 갑자사화가 일어나 벗이었던 한원당 김굉필이 죽음을 면치 못했고 정여창 또한 부관참시됐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복권됐다.

정여창은 유학이 상정하는 이상사회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바로서야 한다는 지론을 견지했다. 그의 올곧은 행실은 집권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정여창이 지향했던 정신을 가늠하며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푸르른 기운이 객을 맞는다. 마당을 지나면 양쪽에 작은 연못이 펼쳐져 있다. 푸른 연잎이 떠 있는 연못은 이편의 마음까지도 푸르게 물들이는 것 같다. 생전 정여창이 좋아했던 주돈이의 ‘애련설’을 떠올리게 한다. 주돈이는 연꽃을 군자의 품성으로 상정하고 이렇게 노래했다.

‘진흙에서 피었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살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고, 속은 비었지만 밖은 곧으며 넝쿨은 뻗지 않아 가지치지도 않았네. 향기는 멀어질수록 그윽하여 멀리서 바라보지만 가까이 할 수 없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의 잔상을 삼삼히 떠올리며 조심히 걷는다. 중앙에 강학공간인 명성당(明誠堂)이 보인다. 이치를 밝히고 행한다는 뜻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오늘날 사사로운 논거로 이치를 흐리고 행실 또한 경거망동하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옛 선비들이 강구했던 사상은 깊이 되새겨봄직 하다.

명성당 아래 좌우로는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유생들이 사용하던 기숙사가 제각기 누각의형상으로 자리한다는 사실이 사뭇 이색적이다.

명성당을 돌아 뒤로 가면 사당이 보인다. 가파른 계단 양편으로 붉은 꽃망울을 터트린 배롱나무가 경사면을 에두르듯 서 있다. 코끝으로 번져오는 아슴아슴한 기운에서 단심(丹心)을 읽어낸다.

정여창과 같은 선비가 그리운 시절이다.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실을 하고, 무엇보다 바른 사유를 견지했던 그런 선비가 말이다. 온통 자신의 삿된 생각만 옳고 사사로운 목적을 감춘 이들의 말잔치만 넘쳐나는 세상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