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5월 8일.
시인이 아닌 사상가인 김지하가 세상을 떠난지 3년째 되는 날이다. 늘 사람의 떠남이 그렇고, 사별이 그러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은 몰랐고,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허하기만 하다. 세상은 그가 예측하고 우려했던 것 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심하게 변질된 것 같다.
김지하. '地下'가 아닌 '芝河'라는 필명을 가진 그는 누구인가? 본명이 김영일이며, 목포에서 다소 특별한 사상적인 내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특별한 인물이다.
세상에서 민주화 운동가, 혁명가, 시인, 그리고 '사상가' 등의 다양한 명칭을 받았다. 그를 분석한 글이 무려 300여 편 이상이니 한국 현대사에서 큰물결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김지하하면 대부분은 '타는 목마름'을 떠올린다. 청년 시절에 '오적'이란 기념비적인 장시를 발표했고, 사형선고를 받아 감옥에 있었다. 그는 그 시대상황을 가장 잘 파악했고,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가장 적극적인 실천을 한 인물이다.
그 본질은 민주였고, 인권, 양심, 자유였다. 그리고 세상을 뜰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과거를 답습하거나 반복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고, 일부는 터무니없이 그를 배척하거나 악용하곤 했다. 비교적 후년의 삶을 가까이서 체험한 내가 아는 한 김지하는 정말 많은 변신을 거듭했고, 그 변신은 그의 본질과 사명감이 완성을 향해온 몸짓이었다.
전투적인 젊은이었던 그는 사형언도와 무기징역, 8년 동안에 걸친 감옥 생활 속에서도 비자율적이지만 수행을 지속하다가 마침내 '생명'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의 해방을 체득했다. '개벽' '만물일체'의 진면목을 깨달은 것이다. 그 순간에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몸의 해방까지 얻었다.
이후 그는 생명운동에 충실하고, 동학사상에 더 몰입하고, 홍긴인간 등 우리 고대 사상과 역사에 관심이 깊어졌다.
그런데 1991년 5월 5일 세상이 그의 본질을 오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는 1991년도에 분신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 때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라는 장문의 글을 조선일보에 실은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 학생들은 경악을 했고, 그와 뜻을 함께 하거나 따르던 소위 민주화 운동가들은 분노를 느끼고, 등을 돌리면서 엄청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그에게 '생명'은 절대적으로 지켜내야할 것이었다. 식물들의 생명마져 소중히여기고, 1989년에는 '한살림 선언'까지 쓴 그의 가치관으로서는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민주화도, 인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하여 그의 일상적인 삶은 더없이 피페해졌고, 마음과 몸의 건강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이 그를 괴롭혔고, 지금까지도 악용한다. 그는 강단이 세고 결기가 넘치는 외모와 그에 못지 않은 정신세계, 그 것을 표현해 내는 글재주와 언변이 탁월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쉴 틈없이 한국 뿐 만 아니라 지구촌의 상황들, 다가오는 인류문명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깨닫고,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다양한 형식으로 추진했다.
2003년부터 4년 동안 생명과 연관된 일을 하는 세계의 철학자들, 생태 운동가들, 예술가들을 대거 초정해 '세계 생명문화 포럼'을 개최했다.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발표도 한 나는 이 포럼이 세계 문명사와 사상사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아직은 집행자들도, 참가자들도, 한국사회도 그 가치와 의미를 잘 몰랐었고, 결국 안타깝지만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아직도 건강이 나쁜 그는 그 무렵에 거처를 원주로 옮겼다. 어린 시절 한 때를 보냈고, 민주화와 생명운동을 하던 곳이었고, 또 장모님인 박경리 선생이 만든 토지문화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도 마음도 많이 좋아져 난(蘭)도 자주 치고, 무엇보다도 먼 나들이를 많이 했다. 다시 동학을 공부하고, 현장을 답사했고 '수왕사' 같은 책을 썼다. 궁예에게 빠져 자기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평가한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궁예와 미륵사상을 재조명했다. 또 평소 주장해왔던 아우라지 미학 때문에 남한강 상류의 아우라지인 여량과 정선 등을 찾아다녔다. 당연히 택시비가 많이 들었기에 경제적으로 곤란할때도 있었고, 그래서 때로는 나도 호출(?)당했다.
그의 수미일관한 '생명사상'은 소명감과 철저한 실천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동학, 증산, 불교,정역, 홍익인간, 풍류 등의 전통사상과 일본 및 서양의 생태사상 등을 수용하여 생명의 실체, 생명의 표현 양식과 구현양식을 찾았다. 평생을 수행자의 자세로 다양한 종류의 독서를 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하며, 사상의 근저가 되는 역사적인 상황을 체험하고, 증거를 수집할 목적으로 현장을 답사했다. 거기서 시대정신에 걸맞는 생명사상을 다듬고, 확장하면서 완성시켜 갔다.
그가 시, 산문, 사상 담론, 그림, 실천, 강연 등으로 세상에 제기한 생명사상의 요체는 생명, 밥, 우주생명학, 천부경, 기연 묘연, 화엄, 신시경제, 홍익인간, 여인, 모심, 밥, 살림, 시김, 향아설위 등의 다소 낯선 말들과 호혜경제, 사이버, 재진화 등의 현대언어들로 표현된 것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그의 핵심사상이기도 한 '그늘'이다. 양지도 아닌 음지도 아닌, 어둠도 아닌 광명도 아닌, 그늘. 그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었다. 사시장철 입는 개량 한복의 적삼을 뒤척거리면서 "이보게. 이렇게 '안팍'의 관계이네." 하면서 '흰 그늘', '검은 그늘'을 나누고, 둘의 다시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게 '밥'이고, '생명'이고,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사상의 내용도 종류가 다양하며 색감이 풍부하고, 깊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한계는 있다. 철학이나 사회과학 등의 학문을 안했으므로 논리적, 체계적으로 자기사상을 구성하는데는 부족한 점이 있다. 또한 일반적인 사상들과 상호교류를 하지 못했으므로 검증받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기준으로 사상가라고 주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는 김지하의 1주기 추모 학술회의를 주관하면서 주제를 <사상가, 김지하 사상의 조명>으로 했고 기조발표를 겸해서 <김지하의 사상가적 위상과 의미>를 발표했다. 그를 체험하고, 역사학자인 나의 기준을 적용하고, 역사상의 사상사들과 상대비교하면서 그를 '사상가'로 판단했다. 그는 비록 문학과 정치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초기부터 수행자의 자세로 진리를 탐구했고, 통찰력의 획득을 통해서 인간본연의 모습을 깨달았다.
이후 실천가로서 소명감을 갖고 수미일관 생명사상의 확립과 전파에 힘썼다. 그 시대 그의 역할이 있었듯 우리시대에도 역할이 있고, 역할을 해야한다. 나는 그의 생명사상이 현재의 시대상황을 고려해가면서 시대언어와 시대논리로서 재구축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벌써 3주기니 이제 그는 아주 다른 세상으로 떠난다. 세상에 부탁한다. 이제는 그를 좀 편하게 놓아달라고. 약간의 지식과 옅은 감성, 검증되지 않은 자기관념으로 남을 재단하는 일은 폭력이다. '영원한 자유인'인 김지하에게는 그러면 못쓴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국립 사마르칸드대 교수)